도종환의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내가 교단 선교부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훈련원 원장님이 종종 시를 소개해 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담쟁이’라는 시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잘 극복해 나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서두에서 이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을 했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것을 넘지 못하고 선교의 꿈을 접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성경 번역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대단한(?) 결심을 했지만 현실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늦깎이 선교사가 되었다.
성경 번역 선교사의 꿈
과거에 비해서 시간이 갈수록 선교는 다양하게 세분화 되어가고 있다. 어릴 때는 선교라는 것이 다만 오지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만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선교를 알아갈수록 문화와 지역에 따라서 아주 다양하게 접근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나도 역시 청년 시절 선교 한국에 참여했을 때는 최소한 2년 정도는 선교지에 가서 헌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단기 선교를 다녀온 후로는 선교에 대해서 조금씩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에 함께 공부하던 동료 신학생들과 성경 번역 선교회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이수하면서 성경 번역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자기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서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듣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아주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방식의 선교도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생각을 갖게 하심으로 인하여 나를 성경 번역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선교를 하게 된다면 성경 번역 선교사로 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내도 이미 결혼하기 전에 내가 했던 그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더욱 이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하나님 앞에 며칠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후, 마침내 그 길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너무 높은 골을 잡은 것인가?
이렇게 결심을 하였지만 바쁜 교회사역으로 인하여 선교사로 준비를 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바빴다는 것은 다만 핑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히려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성경 번역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쉽지 않았다. 선교단체에 허입되기 위한 과정은 제쳐 놓더라도, 성경 번역 훈련을 하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으로 가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려면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하며 그 훈련과정 또한 언어학을 병행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우선 영어를 해야 하는데 바쁜 교회사역을 하면서 영어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중에 나와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한 친구는 절차를 밟아서 벌써 선교사로 떠났었다.
낮은 자존감
지금 생각해 볼 때 나로 하여금 시작을 못하게 만든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낮은 자존감이었다. ‘나는 언어감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항상 나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뤘던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 성경 번역이 정말 중요한 사역이긴 하지만 내 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좀 더 언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합리와 시키려고도 했다. 그래서 성경 번역이 아닌 다른 사역으로 선교를 할 것인지 아니면 목회를 할 것인지를 놓고 기도는 계속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훈련을 좀 더 받기 위해서 교회를 사임하고 외국으로 잠시 떠났다. 이런 훈련이 나에게 도움은 되었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자꾸만 미루는 결과를 낳았다.
훈련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선교를 향한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고 교회사역을 시작했다. 또다시 미루게 된 것이다. 마치 시험공부를 시작하는 아이가 해야 할 공부가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자꾸만 책상 정리나 주변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모습이었다.
계속해서 주변 것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보내다가 정작해야 할 선교를 시작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훈련의 시간과 흔들림의 시간들이 있었다. 이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 가시고 하나님의 길로 조금씩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해 가시는 것 같다. 선교사로 헌신하더라도 현장으로 나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나를 극복하기
결국은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께로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리는 그들에게서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을 배우게 된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예수님이 병든 친구를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집까지 왔지만, 문 앞에도 용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파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라고 생각하고 병든 친구의 침상을 내려놓았다면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거기서 멈춘다고 해서 아무도 그 친구들을 탓할 수 없다. 사랑하는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 자리까지 온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그렇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장애물을 만났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또 다른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지점에서 구멍을 뚫고 병든 친구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 그럴 때 그들의 병든 친구는 병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여호수아 14장에 나오는 갈렙에게서도 큰 교훈을 얻게 된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이나 되었고 그가 정복해야 할 땅은 크고 견고한 성읍들과 장대한 아낙 자손들이 장애물로 떡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갈렙은 자신의 나이를 극복하고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한 것이었다.
장애물은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장애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장애물을 만나면,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은 안되는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리고 담대히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14:12)라고 말한 갈렙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