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의 고민: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모태신앙이 아닌 나로서는 청년부를 섬긴 7년은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교회 안에서 정말 놀라운 일들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챙기고 섬겼다.

하지만 돌아봤을 때 내가 진심으로 몇 명이나 예수님처럼 사랑했을까? 또 몇 명이나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었을까? 돌아볼 때 마음이 혼란스럽다.

열심히 교회에서 일하고 섬겼지만 우리의 수고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서처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데 집중했을까? 아니면 빨리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고 사람 숫자를 늘리려고, 교회 안에 사람들이 더 오게 하는데 우리의 시선이 가 있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제자도는 성도가 교회 안에서만의 삶이 아닌 전인격적인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땅에 도대체 어떠한 메시지를 삶으로 보여주고 또 어떤 나라를 만들며 나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쳐 나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리스도인의 어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 그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종교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최고로 많이 섬기는 사람일지라도 만약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가치관들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사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기준이 되어버린 세례는 사실 회중 앞에서 지금 이 순간부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겠다고 선포하는 것이고, 힘든 고난과 시험이 있는 그 좁은 길을 끝까지 완수하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는 것이다. 그냥 교회 다닌 지 몇 년 되어 교회에 속하기 위해 멤버십에 가입하듯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순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천국의 가치들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성경의 많은 가치 중 나에게 와닿은 교회 공동체 안에 꼭 있어야 할 3가지 가치들을 풀어보겠다.

언약안에 있는 공동체
세상에 많은 공동체는 우리의 필요를 인해 혹은 우리와 잘 맞는 사람들을 우리가 추리고 골라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 무리는 나의 마음에 안 들 가능성이 작다. 왜냐면 마음에 안 들면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서 사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로 우리를 부르실 때 단 한 가지만 요구하신다. 바로 믿음이다. 그렇기에 교회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있다. 한가지 예수님을 믿는 것 빼고는 99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참 곤란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만드실 때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하고 홀로 찢긴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셨다. 즉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은 끝까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를 이어받아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이기적인 죄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우리가 이기적이고 일방적으로 깬 그 언약의 책임까지 끝까지 지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언약 안에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그 속성을 닮은 공동체인 것이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섬기며 기다려주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서로에게 진리를 말해주는 권면과 서로를 세워주는 격려를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끝까지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허물에 책임을 져주는 공동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됨을 잘 이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권력을 잘 사용하는 공동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만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가끔은 물질과 위치가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성향과 배움의 정도가 권력이 되기도 한다.

따로따로 가진, 각각 가진 권력이 천지만 별이고 비교적이지만 권력이 무한하거나 권력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가진 권력이 얼마만큼이든 그 권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에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하나님과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피조물인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권위 앞에 순종할 줄 알았고, 서른 살까지 목수의 소임을 다 했다.

그 이후 공생애 때는 능력과 권위를 남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낮은 곳에 내려가 소외된 자들을 섬기다 모든 것을 주시고 돌아가셨다.

그 이후 초대 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서로 도와주는 모습이 보였고, 야고보서에서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권력을 어떤 곳에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에 제한을 두며 이만큼이면 돼지 하는 불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멀리 못사는 나라에 보내는 선교헌금이 우리의 영향력의 끝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만함에 갇혀있지 않은가?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우리 지역사회의 문제들에는 눈을 감고, 고아와 과부 그리고 소외되고 마지 막된 자들에게는 관심 없는 이기적인 가치관이 우리 교회 안에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는 벌써 잘 살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만 붐비고, 우리 주위에 알코홀릭, 마약중독, 창녀 또는 문제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면 안 되는 사람인 것 마냥 눈을 찌푸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앞에 발을 들인 것이 언제일까?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소외된 자들을 찾아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 시켜주는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있기를 소망한다.

은혜로 고이기만 하고 흐르지 않는 물은 곳 썩은 물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권력을 잘 사용하는 공동체가 우리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그네의 삶을 같이 사는 공동체
결국 언약 안에 살고 권력을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우리의 하늘 소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실만을 살지 않고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 공동체가 이 땅에서 만 볼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또 현재 이 땅의 나의 소유는 나의 영원에 비해 너무 작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지금 짧은 현실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알려주셨다. 고난과 역경에 물든 삶을 택하시고 걸어가신 것은 우리에게 지금의 힘듦이 영원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신 것이다.

이처럼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긴 영원중에 짧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가치대로 담대하게 우리 공동체는 이 땅에 다른 가치를 뽐낼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구별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가치관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식별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봤을 때, 우리 공동체를 봤을 때 그 다른 가치관을 볼 수 있을까?

‘찐’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의 가치관과 우리 공동체의 가치관이 열매를 맺어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룩함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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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영
현재 대학원생으로 10년 동안 섬겨온 찬양팀에 관한 이야기와 1.5세대로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는 교회 청년으로서 무엇을 하며 살 것 인가? 누구와 살 것 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