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여자의 일생(A Woman’s Life)’은 프랑스의 소설가인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이 188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모파상은 단편소설 ‘목걸이(The Necklace)’의 작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게되면 비단 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궁극적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무엇이 우리의 일생을 좌우하는가? 그리고 행복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진하고 착하게 자란 여주인공 잔느(Jeanne)가 인물좋고 친절한 줄리안 드 라마르(Julien de Lamare)와 결혼했다. 그녀는 얼마못가 줄리안이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줄리안은 잔느 집안의 재력이 탐났던 것이다. 바람둥이인 그의 본색이 곧 드러난다.

줄리안은 하녀 로잘리(Rosalie)를 범해 임신시킨다. 로잘리는 젖먹이 적부터 잔느와 함께 자랐었다. 잔느 집안에선 이를 조용히 수습코자 로잘리를 다른 남자에게 후한 조건으로 시집보낸다. 바람둥이 줄리안은 친구처럼 지내는 백작의 부인과도 정을 통한다. 백작이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불륜의 현장을 덮쳐 줄리안과 자기 부인 둘 다를 죽이고 만다.

잔느는 남편 줄리안이 죽은 후 숙모와도 사별한다. 숙모는 오랜 세월 식객으로 잔느집에 얹혀살며 쭉 함께 지내왔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사람이라곤 외아들 폴(Paul)이 전부다. 그러나 폴은 여자와 바람이 나 학교까지 그만두고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폴은 이런저런 사업을 한답시고 잔느에게서 큰 돈을 얻어가지만 사업이 매번 실패해 빚을 남기고, 덩달아 잔느의 재산도 고갈되어간다.

외로운 처지가 된 잔느에게 어느날 옛 하녀 로잘리가 찾아온다. 로잘리는 남편과 이미 사별했지만 돈이 넉넉해 생활엔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줄리안이 범해 태어난 아들도 이미 장성한 상태였다. 로잘리가 잔느를 찾아온 건 단지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다. 로잘리는 잔느의 재산을 정리해 낭비를 줄이고 알뜰한 규모로 관리할 수 있게 도왔다.

한편, 잔느의 아들 폴은 함께 도망쳐 살던 여인이 딸을 낳은 후 죽자, 그 딸을 잔느에게 보내며 자신도 곧 엄마에게 돌아가겠노라고 연락을 보내왔다. 잔느의 인생을 쭉 지켜본 로잘리가 마지막 대목에서 말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도 또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은 것인가 봐요.”
잔느란 한 여인의 일생이 그렇게 석양빛을 머금으며 저물어간다.

묵상과 교훈
무엇이 우리의 일생을 좌우하는가?
주인공 잔느는 끊임없이 뭔가를 잃어가는 삶을 살았다. 결혼 직후부터 남편의 사랑을 잃더니 결국 남편 자신을 잃고, 아들과의 오손도손한 삶을 잃은 것도 모자라 그 아들로 인해 재산까지 잃었다. 그러나 얻는 것도 아주 없지 않았으니, 하녀 로잘리가 돌아왔고 아들 폴이 영국에서 보내준 손녀가 생겼다.

모든 걸 잃어버린 인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걸 상쇄해줄 하녀와 손녀로 인해 잔느는 전적으로 불행하지만은 않은 인생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잔느의 회복은 로잘리란 하녀에게서 비롯되었다. 카사노바같은 줄리안에게서 피해를 본 건 매 일반이었으나 로잘리는 잔느와는 달리 누군가를 돕는 인생으로 전환함으로써 ‘베푸는’ 인생을 살았다. 설혹 불행에 처했을 때에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돕는 삶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소설에선 그 메시지의 산증인으로 하녀 로잘리란 인물을 설정했다. 그녀는 주인 아저씨에게 정조를 뺏겨 애를 가진 후, 돈을 탐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했었다. 그러나 필경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예상되었던 그녀의 인생이 놀랍게 유턴한다.

이를 보면 열왕기상 17장에 등장하는 사르밧 과부의 인생이 떠오른다.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마지막 음식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리라고 결심했던 사르밧 과부. 그녀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를 도와 음식을 먼저 대접하는 입장이 되게 하셨다.

그 이끄심에 순종할 때 사르밧 과부의 비극적 인생은 오히려 돕는 손길로 반전되었다. 그러면서 경제적 궁핍이 해결되고, 죽게 된 아들의 목숨까지 하나님이 되살려주시는 기적도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자. 잔느처럼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나, 아니면 로잘리처럼 하녀 신세로 태어났나 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일 수 없다. 없어도 오히려 베푸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비극의 사슬에 끌려다니는 인생에 머물 것인가? 우리 모두가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교훈을 ‘여자의 일생’을 통해 얻는다.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가?
주인공 잔느의 삶은 결혼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구나 부러워할 수 밖에 없는 유복한 인생이었다. 집안은 부유했고,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부모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결혼 직후부터 어긋나기 시작해 종국엔 파국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아들로 인해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었으며, 늘 의지하던 아빠마저 죽었다.

그런 잔느에게 옛 하녀 로잘리가 어둠 속의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로잘리의 손길은 몹시 추운 날 두툼한 외투처럼 따뜻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아들 폴의 소생인 손녀까지 오게 되자 잔느의 인생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다.

하녀 로잘리는 이를 두고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이 인생>이라는 소회를 밝혔지만, 기실 인간의 행복이란 그 근거를 자신의 환경에 두게되면 언제나 불안하고 허약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다며 기고만장했던 타이타닉호도 결국 빙산에 부딪쳐 차디찬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맞이한 안타까운 최후다.

우리로선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행복과 불행의 싸이클. 어지럽게 춤추는 희비 쌍곡선에 어찌 장단을 맞춰야할지 난감할 뿐이다. 그러나 행복의 기반이 영원한 반석에 있게 된다면 모든 게 달라진다. 우리가 성경에서 캐내는 행복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환경이 건드릴 수 없는 행복. 깊고 깊은 샘물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기쁨.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생명의 원천이 있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합3:17-18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께 뿌리내려야 한다. 만약 잔느가 그럴 수 있었다면 ‘여자의 일생’의 마지막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가슴뛰는 외침으로 그 결말을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남편이 바람을 피고, 아들 사업이 망해 빚을 떠넘기며, 의지하던 부모, 숙모가 다 죽어 나만 남게되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