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화창한 어느 봄날, 서울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라고 불리던 곳에서 미군 트럭에서 급히 내린 청년이 보자기에 싸인 뭔가를 들고 자동차를 피해 급히 인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들고 가던 물건이 길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김치 통이었다. 길바닥이 붉게 물들고 청년은 서둘러 대충 치워 보자기에 담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못 먹게 된 김치가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러나 더 딱한 노릇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을까? 하는 점이다.
나는 그 젊은 청년의 모습을 지금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특정대학 진학을 위해 한 달만이라도 그 유명했던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 공부해 보고 싶어 서울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던 그는 인천의 이모님께 들렸다가 정성껏 마련해 보자기에 싸 주신 김치 통을 들고 마침 서울로 간다는 미군부대 트럭을 얻어 탔었다.
서울의 삼각지 로터리를 지날 때 그 미군 운전병은 갑자기 자기 갈 길의 방향이 아니라며 내리라고 해서 생긴 사고였다. 보자기가 너무 낡았던지 출렁이며 달려온 경인도로에서 바닥에 부딪치며 찢어졌던 것이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시골촌놈의 상경기다.
많은 길들은 크고 작은 사거리인 십자로(Cross Road)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물론 삼거리나 오거리들도 있지만 대부분 십자로인 사거리에서 각자의 갈 길을 찾아 방향을 바꾸게 된다. 반면 회전교차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터리(Rotary)다. 수많은 차량들이 여러 방면에서 들어와 이 회전교차로를 돌아 각자 갈 길을 찾아가는 교통흐름의 요충지이다.
뉴질랜드에는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라고 하는 크고 작은 회전교차로가 아주 많다. 처음 찾는 뉴질랜드 방문자들은 많은 차량들이 신호등도 없는 교차로에서 아무 사고도 없이 너무나 질서 있게 조용히 물 흐르듯 흘러가는 교통흐름을 보며 낯설기도 하고 신기해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원칙이 있다.
먼저 진입해 돌고 있는 차량이 우선이고,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차량에 양보해야 하며, 그리고 방향지시등을 켜야 한다. 진입할 때나 빠져나갈 때 방향표시를 해야 함은 필수다. 운전자들이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므로 회전교차로의 효율성은 극대화된다. 혹시 빠져나갈 길을 놓쳤을지라도 한 번 더 돌면 된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사는 동안 라운드어바웃 회전교차로에서 접촉사고는 물론 어떤 사고도 본 적이 없다.
회전교차로는 소통의 상징이다. 서로가 가는 방향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른 차량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지만 서로 다투거나 경쟁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소통하며 앞으로 나가는 길목이 된다.
또한 양보와 배려의 상징이다. 서로 먼저 가려는 욕심만 부린다면 충돌하고 모두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원칙과 작은 규율을 지킬 때 차량흐름이 서로에게 방해 없이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멋진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다.
또한 교통신호체계 하에 차량흐름이 끊어져도 기다리게 되는 귀중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에너지절약과 비용절감이다. 신호등운영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시설설치나 관리에서도 비용이 절약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라운드어바웃의 중앙에는 크고 작은 화단이 조성되어 도시미관을 살려주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여유롭게 해 준다.
한국의 도로에도 회전교차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도심의 차량물결을 회전교차로가 처리하기는 불가능 할 수도 있겠지만 교통량을 파악하여 지역에 따라 적절하게 운영하면 훌륭한 소통이 이루어 질 것으로 믿는다.
최근 비교적 차량 수가 적은 사거리나 지방도로에서 회전교차로가 등장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회전교차로의 소박함은 양보심과 협동심, 그리고 작은 준법정신에서 오는 것이다.
이 소박함이 큰 힘을 발휘한다. 소통이 안 되면 막히고, 막힌 곳을 뚫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며 더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막힌 병목을 뚫기 위해 서로가 더 큰 경적을 울리고 더 신경질적으로 차선을 바꾸고 끼어드는 방법으로는 소통은커녕 더 뒤엉키고 울화만 쌓일 것이다. 지금도 운전할 때 마다 여전히 나는 뉴질랜드의 회전교차로를 머리에 떠 올리곤 한다.
아내가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와 처음 한국의 도로에서 운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연수를 받기로 했었다. 첫날 도로주행을 옆에서 지켜보던 교습선생의 첫 마디는 깜빡이를 너무 잘 쓴다는 평가였다고 한다. 그 말은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깜빡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한국의 교통사고율은 세계적이다. 좁은 땅에 차가 많으니 사고도 많을 것으로 단순히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때 단속을 철저히 하겠다던 정지선 지키기, 끼어들기, 그리고 깜빡이 켜기에 조심하던 운전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깜빡 사라진 것 같다. 방향지시등 보다는 비상등을 더 잘 사용하는 것 같다.
출퇴근 복잡한 길에서 주행선 하나를 점거하고도 비상등 켜놓고 버티면 만사 오케이, 차선을 따라오던 차들이 줄줄이 밀려 서는데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이런 배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도 나는 고국에서 마저 이방인과 같은 느낌으로 사는 것일까. 정말 내 자신이 이상한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운전자들이 비상등보다는 방향지시등을 더 잘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손가락 하나 움직여서 알리는 방향지시등이 주변의 많은 운전자들에게 그리고 보행자들에게도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빛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왜 속도에 그렇게도 집착할까. 속도보다는 방향을 더 살펴야 하지 않을까.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 하지만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이 아닌 곳을 길로 착각하고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길을 찾아 헤매는 나에게 네비게이션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친절한 안내를 외면하고 경로이탈이라는 음성도 무시하며 내 기분대로 이 길이 더 빠르다고 아는 체하며 다른 길로 접어들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그 때 마다 나는 옆에 앉은 아내에게 미안하기 일쑤다.
뉴질랜드에서 운전할 때 마다 옆 자리에서 지도를 돌려가며 안내하던 아내에게 핀잔을 주던 내가 부끄러운 생각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지금은 이렇게 복잡하고 엉킨 도로 위의 수많은 자동차들 틈새에서 운전하도록 친절하게 도와주는 네비의 음성이 얼마나 고마운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계를 향해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오곤 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우리들의 인생 네비게이션이다. 그 분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함으로 세상은 혼란 속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우리의 방향지시등 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그 때 나도 내가 켜야 할 방향지시등이 어느 쪽인지를 밝히 알 수 있고 내 방향지시등을 보는 주변의 사람들이 더욱 안전한 인생운행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