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한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존엄성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호스피스 사역은 삶을 잘 정리하고, 평화 속에서 임종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확신을 갖게 하고, 불신자에게는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 호스피스 사역이다.

진정한 이웃으로
호스피스 사역의 성경적 배경으로,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질문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이야기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아니다. 율법학자나 강도는 더욱 아니다. 이 이야기는 강도에게 두들겨 맞아 거의 죽게 되어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는 사람의 요구를 응답하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초점이 있다.

당시 유대인이 가장 혹독하게 경멸의 감정을 품었던 대상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심지어 에돔 사람이나 블레셋 사람보다도 못하게 여기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혐오하는 민족이라고 멸시했다.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의 초점을 생각하기보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사마리아인과 비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춘다. 사마리아인은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의 위선적인 질문에 “너는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 물으신다. 율법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호스피스 사역은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가장 위급한 절대 위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끝까지 돌보아 주는 이웃이 되어 섬기는 사역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이다. 교회사에 상당 기간 동안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어 강도 만난 사람들과 같은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여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모든 사람은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죽기를 두려워한다. 그 죽음의 노예에서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셨다.

호스피스 사역은 죽음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일치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기에 마땅히 교회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물 한 잔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할 수 있다. 화분에 물을 줄 수 있다. 이를 닦고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목이 마른 사람의 목을 축여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한 것은 그 상황과 환경에 맞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봉사 영역이 다양하지만, 호스피스 사역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역이다. 생애 최대 위기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승리는 끝났다. 죽음의 독침은 이미 빠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호스피스 사역은 그 죽음의 문제를 준비하게 한다. 평안함 속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호스피스 사역은 참여하는 사람들을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누구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까이 오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렇기에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생각하게 하기에 인간을 더 성숙하게 한다.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어느 설문조사에서 보니,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에 유서를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 지난 1년간 자살 충동을 느낀 사람이 20%였다. 지난 1년간 20%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 고통이 끝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고통의 끝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성경은 어디에도 자살하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한다는 구절이 없다. 생명의 주권자에게 도전한 인간에게 영원한 지옥이 기다릴 지도 모른다. 가장 두려운 부활이다.

지금도 견딜 수 없는데,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1%도 열어 놓을 수는 없다. 숨 쉴 수 있는 지금이 더 나은 시간일지 모른다. 자살은 고통의 끝이 아니다. 어쩌면 지독한 고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지금 혹시 그 위험 앞에 있는가? 한 번 선택하면, 바꿀 수 없는 그 끔찍한 결정이다. 그것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선택이다. 죽음에도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다.

호스피스 사역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을 잘 준비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한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다. 몸의 파괴는 개인이 스스로 선택할 사항이 아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선택이 될 수 없다.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분의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한 사람에게는 끝이고 마지막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신다. 삶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이웃을 섬김으로
호스피스 사역의 기본 정신은 성경에 기초한다. 이민 생활 속에 마음의 병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호스피스의 사역은 절망을 소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다.

교회마다 이 호스피스 사역의 정신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도움을 호소조차 할 수 없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는 이런 이웃들을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에 빚 진자로…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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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상담 전공. 코람데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양주한인예수교장로회(고신)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17년부터 사명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다. 만10년 6개월 동안 뉴질랜드 CREATIVE ABILITIES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했으며, ‘호스피스 사역’과 관련하여 글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