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 자신의 현재를 사는 일”

교회 중고등부 시절에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여서 성경 공부하고 특별 활동도 하던 그때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하는 부분을 “소영이는 오래 참고 소영이는 온유하며” 그렇게 사랑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하는 거 있잖아요.
그 여러 가지 덕목 중에 진짜 잘하는 거 아니면, 꼭 갖고 싶은 성품을 각자 골라서 하나씩 해보는 겁니다.ㅇㅇ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ㅇㅇ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 차례가 돌아와 나는 말했습니다.

”소영이는 모든 것을 바랍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바라고 꿈을 꾸던 그 시절의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새로운 꿈을 꾸고 여전히 많이 바랍니다. 여느 사람들처럼요.
그래도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듣기 좋은 응원의 문구와 ‘꿈꾸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적이고 뼈아픈 각성 사이에서 늘 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여하튼 난 지금 여기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와 있습니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어수선해져서 해외여행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와 있습니다.

항공사에서 제공해준 호텔 숙박권으로 인천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프랑크푸르트를 경유에서 자그레브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크로아티아 당국이 한국에서 들어오는 승객을 모두 관리하기로 했나 봐요.

그 비행기를 타고 온 승객 중에 한국인은 둘이 있었는데 크로아티아 말도 잘하는 이 나라에서 일한다는 청년과 나뿐이었습니다.

둘이 따로 불려가 A4 용지 두 장짜리 양식을 다 채우고 예약한 숙박지 주소와 연락처도 적고 그쪽에서 준 전화번호로 보건당국 직원과 통화하고 메일도 주고받고 해야 해서 아주 긴 시간 붙잡혀 있다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먼저 끝내고 가고 나는 조금 더 있다 나와 보니 짐 나오는 벨트는 멈췄고 직원이 내 캐리어 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애초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숙소에서 알선해준 픽업을 예약했는데 내 이름을 써서 들고 있겠다던 기사가 안 보이는 거예요. 기다리다가 그냥 간 거죠. 물론 금액은 지불된 상태였구요. 가방을 끌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는데 말입니다.

하긴 예상 시간보다 2시간은 지났으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는데 막상 한밤중에 낯선 곳에서 그렇게 남아 있으니까 겁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한국 항공기가 승객을 태우고 현지에 갔는데 승객을 내리지도 못하게 하고 타고 온 비행기로 다시 돌려 보냈다는 뉴스를 듣고 난 후 인데다 여행 가방에 챙겨 넣은 김영하님의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주 담대한 마음이 되었답니다.

입국하게 된 것도 다행이고 공항 밖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호텔로 숙소를 정한 게 아니라서 주인이 미리 알려 준 장소에 있는 열쇠를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찾아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들어온 방은 다행히도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한 방향제 냄새만 빼고 모든 게 좋습니다. 침실 하나에 거실, 주방, 욕실이 있는 아파트 같은 곳입니다.

와서 보니 사실 자그레브는 조금 우중충합니다. 늦겨울이라 하지만 최저기온이 3~4도이고 낮 최고 기온은 16도 정도 되는 포근한 날씨입니다. 날씨가 잔뜩 흐려서 그랬는지 춥지는 않은데도 유난히 회색이고 스산한 느낌입니다.

낡고 오래된 빌딩들은 높이 제한이 있었는지 비슷한 모양의 오륙 층 높이로 거의 같습니다. 공사 중이거나 공사하려는지 비어있는 건물도 있고 어딘지 추운 느낌입니다.

성 마르코 성당(St. Mark’s Church)

자그레브 집이 마음에 드는 나는, 스산한 시내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가도 자꾸 집에 들어옵니다. 빵이나 과일을 사고 한인 상점에서 라면도 사서 갖고 들어와 작은 화분이 놓인 예쁜 식탁에서 혼자 먹습니다. 아무도 날 찾는 사람도 없고 누구를 위해 뭘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의 집은 경험 해보지 못한 진짜 휴식 같은 시간이 됩니다.

뉴질랜드와 무려 12시간이나 늦게 가는 시차 때문에 피곤해져서 낮잠도 잡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제 사흘째인데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자꾸 줄어들고, 노래를 틀어 놨다가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TV를 틀었다가 성경을 읽고, 차를 마시고, 원고를 쓰고, 씻고 화장도 합니다.

아침에 일찍 자그레브의 명소 몇 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자그레브 대성당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볼 땐 조용한 것 같았는데 들어가 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거예요.

자그레브 대성당 안에서

조금 있더니 사제들이 나와서 진짜 미사를 드리는 거였어요. 중세에 세워진 멋진 성당이 비어져 간다 하는데 여기 성당은 아닌가 봐요.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많고, 성당이 화려하고 번쩍거리지 않았지만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내 예배를 드립니다.

‘여행은 뭘 보려고 가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의 현재를 사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를 들여다보는 근사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인 플리트비체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이제 간단히 짐을 싸고 늦지 않게 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