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중 “알라딘과 요술램프”

“저는 램프의 지니입니다(“I am the genie of the lamp”).
뭐든 분부만 내리십시오 (“Your wish is my command”).

‘알라딘과 요술램프’(Aladdin and the Magic Lamp)는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 즉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 중 하나다. 천일야화란 큰 이야기 안에 ‘알라딘과 요술램프’ 등의 작은 이야기들이 벽면에 걸린 액자처럼 위치한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천일야화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 사산왕조(The Sasanian Empire)의 왕 샤흐리아르(Shahriar)가 아내와 노예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둘을 처형해버린다. 그 뒤부터 왕은 여성에 대한 복수심으로 처녀와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바로 죽이는 일을 일삼았다. 학살은 거리에서 여자가 사라질 정도로 이어졌다.

이를 보다못해 한 대신의 지혜로운 딸인 세헤라자데(Sheherazade)가 왕비를 자청했다. 그녀는 1천1일 간 매일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 번 이야기가 궁금해 계속해서 처형을 미루던 왕은 결국 마음이 누그러져 학살을 중단하게 되었다.

‘알라딘과 요술램프’는 그 중 한 이야기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어야 할 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천일야화가 아랍어 원본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드바드의 모험 등 천일야화를 대표하는 동화들이 실은 18세기초 프랑스인 앙투앙 갈랑(Antoine Galland)이 12권의 번역본 시리즈를 만들 때 임의로 집어넣은 다른 출처의 이야기들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천일야화, 하면 갈랑의 번역본이 원본처럼 통용되고 있으므로, 우리도 굳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알라딘과 요술램프’를 천일야화의 하나로 간주하여 묵상의 맥을 잡아본다.

우선 천일야화가 태동하게 된 고사에서 우린 악이 더 큰 악을 확대재생산하는 비극을 보게 된다. 아무리 아내가 불륜이란 악을 저질렀다지만, 왕은 개인적 한풀이를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처녀들을 학살하는 더 큰 악을 범하였다.

이 사례는 성경 사사기 19-20장의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어떤 레위인이 행음하고 집을 나갔던 애첩을 다시 데려오는 길에 사악한 자들에 의해 애첩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 애첩을 밤새 윤간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그 레위인이 첩의 시신을 열두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각지로 보냈다. 그 일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일어나 베냐민 지파는 남자의 씨가 마를 정도로 도륙당하고 말았다.

사사기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19장 1절을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라고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왕이 없는 사사 시절이었던 탓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단 뜻은 아닐 것이다. 천일야화만 보더라도 페르시아에선 왕이란 자가 도리어 여자의 씨가 마를 정도로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는가.

사사기에서 말하는 “왕”의 부재는 인간 위의 인간, 즉 절대군주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정작 사사기 기자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좌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애첩의 행음과 기브아인의 윤간과 레위인의 사체토막과 베냐민 남자들의 도륙을 초래한 근본이유라는 것이다.

로마서 12:19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한다. 심판의 주권이야말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초석이다. 천일야화도, 레위인 사건도 하나님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진노를 뻗쳐 악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렸다.

천일야화 중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알라딘과 요술램프’다.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알라딘(Aladdin)이란 가난한 소년이 살았는데, 어느 날 돌아가신 아빠의 동생이라고 자칭하는 마법사(sorcerer)가 찾아온다. 그는 알라딘에게 그를 보호할 반지(the magic ring)를 끼워주고는 땅밑 동굴에 있는 램프를 꺼내오도록 시켰다. 그 램프는 여느 램프와 달리 실은 마법의 램프(the magical lamp)였다.

알라딘은 램프를 손에 넣게 되지만 자기를 죽이려는 마법사의 음모를 알고 이를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마법사가 바위로 동굴의 문을 닫아버리지만, 알라딘은 반지 지니(genie=요정)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집에 돌아온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지니가 나타났다. 그는 알라딘이 명령만 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주겠다(Your wish is my command.)고 말한다. 알라딘이 우연히 공주를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램프 지니가 값진 보석을 만들어내고 하루만에 궁전도 짓고하여 알라딘은 마침내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복수를 노리는 마법사가 램프 장수로 위장해 농간을 부린다. 공주를 속여 새 램프로 바꿔준다며 낡은 요술램프를 가져오게 했다. 마법사는 램프에다 공주까지 빼앗는다. 알라딘은 반지 지니의 도움으로 위치를 알아내 램프를 되찾고 마법사를 죽인다. 공주와 함께 궁전으로 돌아온 알라딘은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이 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지니란 존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Your wish is my command! 알라딘의 어떤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지니의 다른 이름은 로또 당첨이요 대박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명목뿐인 신앙이라면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마태복음 7:7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을 ‘지니’ 대하듯 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매우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내 신앙이 진짜인가?

단언컨대, 하나님을 지니처럼 이해한다면 그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지니는 그의 무한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단지 알라딘의 종일 뿐이다. 시편 16:2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주시니”(You are my master / NLT version)라고 고백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주인이셨다.

필자의 졸고 중 소설 ‘손길’(원제:새로운 시작)에서 주인공 리건은 그 엄연한 진리와 너무 뒤늦게 마주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한다.

“내 믿음은 한낱 욕심에 불과했다. 내 자신의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난 누구든 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만 해준다면 그 자를 예배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게만 해준다면, 나는 그 자도 예배했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나의 왕이 아니었다. 누굴, 왜 예배할 지는 내가 결정한다. 내 인생의 왕좌엔 여전히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오, 예수님!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리건이 그랬듯, 내 인생의 왕좌에서 자아가 내려올 때 비로소 참된 예배자가 된다. 내가 움켜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아가 사랑을 고백하자. 그 간절한 마음을 찬양으로 바치고 싶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 주님만 사랑해 /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 그 사랑 위에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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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