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와 꽃바구니

“안녕하세요, 노래하는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해나리 입니다~! 서울에서 케이리이 에엑~쓰 타고 왔어요!”

나주에 위치한 시골교회 사역에서 내가 한 첫인사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녀야 하는 나 같은 사역자들에게는 Korea Train eXpress가 생겨서 얼마나 감사한지… 전국 팔도 어느 곳이든 하루 만에 다녀와야 하는데, 무궁화호 같은 일반 열차로 왕복 10시간을 오간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내가 악기와 의상, 장비 등을 가지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지방에 내려가면 매니저 목사님이나 초빙하신 교회 성도님이 마중 나와 계신다. 그래서 차로 교회까지 이동한다.

사역 초반엔 장비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전자 바이올린 한 대에 라인 하나가 다였다. 음향 시스템에 연결해야만 소리가 나는 악기이기 때문에 음향 장비의 여부가 확인된 곳만 갈 수 있다. 또, 한국 대부분의 교회에는 웬만한 스피커와 앰프, 믹서 등이 이미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KTX에서 내려서 자동차로 한참을 이동해 들어 온 이곳 나주의 시골교회에는 스피커도 앰프도 믹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이크가 하나 꽂혀있는 기타 앰프 한 대 밖에는….

기타 앰프도 음향기기이기 때문에 음향 장비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 맞기는 맞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자 바이올린이 어떻게 소리가 나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반인이 알 리가 없다. 사실상 연주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 주님께 지혜를 구했다.

바이올린에 라인을 연결해서 기타 앰프 한 곳에 꽂았다. 그랬더니 소리가 나긴 나는데, 드라이브가 잔뜩 걸린 전자기타 소리가 났다. 이미 꽂혀있던 마이크에서도 전자기타 소리가 났다. 최대한 이펙터 레벨을 줄였는데도 노래하기에 예쁜 소리와는 많이 멀었다. 이미 뮤지션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내려놨는데, 문제가 생겼다! 기타 앰프의 두 슬롯(잭을 꽂는 구멍)을 이미 다 써 버려서 반주용 음악(MR)을 재생할 장치를 꽂을 슬롯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반주도 못 틀고 생 연주와 노래만 해야 한다!

다른 무언가가 없을까 하고 강대상을 열심히 찾아보니 새벽기도 배경음악을 재생하는 CD플레이어 작은 게 하나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낡은 컴퓨터를 빌려 인터넷에 올려놓은 MR을 다운받아 CD에 구웠다. 그리고는 CD플레이어에 넣고 틀었는데, 소리가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래서 교회 집사님 한 분께 부탁해서 바이올린 연주할 때는 마이크를 CD플레이어에다가 대고 계시고, 내가 노래할 때는 마이크 스탠드 역할을 해 주셨다.

준비하느라 시간을 많이 뺏겨 저녁 식사도 못한 채 이미 시작 시간이 되어 교회 성도님들 및 동네 어르신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여분 들어와 앉으시니 이미 교회가 꽉 찼다. 관객이 코앞에 앉아있는 곳에서 연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 지 몰라 어색했다.

교회 성도님들께 초청받아 오신 동네 어르신들은 무슨 트로트 가수가 하나 온 줄로 알고 계셨다. 그래서 신나는 곡 위주로 선곡해서 연주를 시작했다. 노래도, 바이올린도, 반주 음악도 모두 전자기타 소리가 났지만, 이런 희귀한(?) 악기와 구경거리가 없었기에 모두 손뼉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연주 도중 갑자기 어르신 한 분이 나 있는 곳까지 나와서 춤을 추시는 게 아닌가? 밭일 끝나고 약주를 드신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잠깐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연주를 하며 그 어르신과 함께 춤을 췄다.

신나게 한 곡 함께 춤추고 어르신이 객석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나한테 무언가를 건네주셨다. 천 원짜리 두 장이었다. 무슨 이런 걸 주시나? 하고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버렸다.

할머니들의 ‘까르르’ 소리의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받지 않았으면 분위기가 차가워지고 약주 드시고 춤추신 어르신도 멋쩍어하셨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사역자가 연주하고 팁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믿지 않으시는 어르신이 난생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기분이 좋으셔서 작은 성의를 연주자에게 표했는데, 화를 내거나 거절을 한다면, 그분도, 다른 안 믿는 분도 교회에 대해, 예수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다음에는 발도 안 들여놓으실 가능성도 크다. 나의 순간의 판단이었지만, 주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이 표현된 듯하다.

전자기타 소리의 공연과 간증 집회가 끝나니 너무 허기졌다. 교회 성도님들이 준비해 주신 저녁 식사 음식 이외에도 공연을 만끽하고 은혜를 받으신 동네 어르신들이 파전, 잡채 등 맛있는 전라도 음식을 가져오셨다. 즐겁고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해 주신 것이다. 이런 곳에서 공연의 퀄리티가 뭐가 중요한가? 그저 마음이 통하고 주 안에서 기쁘고 즐거우면 주님도 기뻐하실 거라 믿는다.
“주님, 기뻐 받으셨나요?”
그날 이후 사역이 끝나고 항상 여쭤본다. 매 번의 내 사역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교회에서 꽃바구니를 크게 만들어서 차에 실어주셨다. 그리고 기차역에 데려다주시는 성도님이 KTX 기차 바로 앞까지 내 짐과 바이올린, 꽃바구니를 들어주셨는데, 문제는 내 손이 두 개라 한꺼번에 모든 짐을 기차에 실어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기차 계단을 몇 회 오르락내리락하며 짐을 다 싣고 출발했다.

서울역에 도착해 내릴 때도 몇 회에 걸쳐 짐을 다 내렸는데, 도저히 꽃바구니와 바이올린, 장비, 가방을 모두 들고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감사한 선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꽃바구니를 버리고 갈 수밖에….

이번 사역 이후에도 지방에 가면 배 한 상자, 블루베리 한 상자, 사과 한 상자 등 여자 혼자 들 수 없는 특산물을 선물로 가끔 주셨다. 그럴 때마다 죄송하지만 아예 가져가지 못하거나 택배로 부쳐주시길 부탁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 힘이 세고 음향을 좀 만질 줄 아는 매니저를 한 명 붙여주세요”
라고 기도를 드렸다.

주님께서 곧 기도 응답을 해 주셔서 차가 있고, 또 독실한 크리스천인 음향 전문가 박종한 매니저를 붙여주셨다. 그 이후로는 꽃바구니도 특산물도 거뜬히 싣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음향이 열악한 사역지를 대비해 장비를 하나, 둘씩 사들여서 지금은 간단한 조명까지도 갖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