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만 30에 결혼하여 만 75세(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특별교육을 받아야 하며 합격해도 3년만 허가 받을 수 있는 나이, 어쩌면 그는 이 나이가 진짜 노인이 되는 나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될 때까지, 세상 많은 도시를 살며 여행하며 머물며 돌아다녔다. 그것이 그의 세월이요 그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세 살이 되기 전 부모 따라 바다를 건너 이주하기를 시작하여 평생 나라와 나라를 옮겨가며 사는 이민과 역이민을 다섯 차례나 경험했으며, 정년은퇴와 더불어 오랜 해외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10년 동안 또 7번의 이사를 포함하여 그는 결혼 후 45년 동안 37번의 이사를 했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본의 아니게 이삿짐센터 사장을 해도 되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 이사 노하우 운운하는 말도 들었겠지만 그것이 어디 자랑거리라도 될 이야기인가. 그의 성품이나 하는 짓을 봐서는 어림없는 소리다. 고지식하고 요령 없는 현실감각에 둔한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인지 칭찬인지를 그의 아내로부터 수 없이도 듣고 산다는 것을 나도 알기에 그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십 년을 가족 고생시키며 그렇게 돌아다녔으면 뭔가 감춰놓은 것이 있을지 누가 알아? 곳곳에 숨겨둔 재산이라도 있을지 몰라, 그 나이에’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란다. 그는 지금도 빈털터리라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그럼 평생 뭘 했을까, 뭘 한다고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단 말일까? 그리고 아직 죽었다는 말이 없으니 살아 있음에 틀림없고 염색을 하지 않아 머리 색깔은 은발이지만 타고난 동안에다 지금도 건강하게 국내와 해외를 다니며 바쁜 세월을 산다는 말도 들린다.
내가 이 주인공의 이야기를 소상히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은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조롱이나 역마살 운운하는 비웃음일지 아니면 어떤 부러움일지 마땅히 들을만한 말이다. 생각에 따라서는. 어쨌건 간에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난 무슨 이유로 무슨 이익을 보려고 이곳저곳으로 다녔는지 이제는 조용히 생각하며 세월을 정리해 보고 그 세월 속에서 무엇을 보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이제는 나의 남은 시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려보아야 할 때임을 믿는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는 결혼이라는 올무에 묶여 모든 걸 포기하고 아이 둘 낳아 기르며 남편 내조하고 신앙생활 하는 평범한 주부로서 그러나 그만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아내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세워진 회사 사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아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편 따라 훌쩍 떠나 멀고 험한 길을 돌아 다시 고향 땅을 밟게 되었지만 이제는 깊어만 가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나는 그 세월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새삼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민 사회에는 세 가지의 속설이 있다. ‘현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누가 공항에서 맞아 주었는지에 따라 그 이민자의 삶이 결정된다.’ ‘이민자는 누구나 고국에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다.’ ‘이민은 남편보다 아내를 더 강하게 만든다.’ 세계도처에서 모이는 한인 디아스포라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금송아지는 자신을 내세우길 원하는 사람들을 풍자한 말이며, 첫째와 셋째는 내 경우에도 들어맞는 경험이 되고 말았다.
나의 첫 이민지였던 남미에 도착했을 때 우리 가족을 맞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남미를 징검다리로 북미로 가서 공부하려던 나의 꿈과 첫 이민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을 뿐이다. 내가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한 목사님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우리의 첫 이민 길은 험난한 돌밭 길이었다. 그것도 유행처럼 떠나가던 미국이민도 아니고 낯설고 험준한 안데스 기슭에서 숨겨진 듯이 수년 동안의 남미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역이민, 이민실패자라는 부끄러움보다는 애처롭게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에 더 마음 아파했을 아내의 심정을 나는 더 깊게 이해해 주지 못했었다.
나는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호주를 혼자서 수개월씩 전전하면서 아내와 두 아이들을 남편과 아빠 없이 지진의 공포에 떨게 했으며 생활의 현장에 내팽개친 부끄러운 남편이요 아빠였다. 또 새로운 도시에서의 이익을 얻어 보려는 가치 있는 노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곤 했을 터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현실감 없고 무분별한 고군분투이었을 뿐이다. 그래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떠돌이 국제 방랑객 생활을 하던 나에게 갑자기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나를 흔들었다.
아내는 또 홀로 남편도 없이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빈손으로 갔다 불어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안데스산맥의 숨쉬기도 쉽지 않았던 고산도시를 떠나며 아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였을까 아니면 한숨짓는 원망이었을까. 그래도 남편이 오라는 곳으로 가서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살 것이란 희망을 안고서 홀로 국제이사를 하는 애탄 발길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못난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그처럼 무책임했고 무능한 남편이었으며 아빠였었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무슨 이익을 보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어떤 물질적인 이익이나 부자가 되어 잘살아 보겠다는 욕망은 아니었지만(솔직히 나는 돈 벌기 위한 이주계획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런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욕망도 욕망이었으며 아이들 교육에 대한 욕망도 나의 욕심에서 온 것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금도 여전히 이 구절은 나의 뇌리를 세게 스친다. 빈손으로 태어나 무언가 손에 넣어 보려고 발버둥 쳐보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헤매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 그 시간도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니 그 허무한 인생이 무엇을 남길 수 있고 무엇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누구는 화려한 명성을 남기고, 또는 재산을 남기고, 기업을 남기겠지만, 난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혹시 몇 마디의 글이라도 남긴다면 먼 훗날 누군가가, 아니면 두 자녀와 또 그들의 자녀들이 읽고 이런 생각과 신앙을 가진 할아버지로 기억될 수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수줍은 미소를 흘려보낸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월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았음을, 그리고 그의 혼과 정신이 우리들 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 땅에서의 나의 시간여행에서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