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없음’의 신비, 연결의 세계

얼마 전 리버풀에 위치한 구디슨 파크 축구장에서는 에버튼과 토트넘의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손흥민의 활약을 보고자 나도 시청 중이었는데, 에버튼 유니폼을 입은 한 선수가 눈에 들어온다. 키가 훤칠한 게 족히 190cm는 되어 보이고, 수염이 덮은 부리부리한 얼굴은 영화배우 같은 외모를 소유한 선수, 그의 이름은 안드레 고메스다.

세계 명문 구단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에서 얼마 전에 이적해 왔다던 그 젊은 선수에게 축구 해설진들도 많은 기대를 하는 듯했다. 나도 이런 선수도 있었다고 하면서 경기를 보고 있는데 후반 중반쯤 깜짝 놀랄 일이 터졌다.

빠른 돌파를 시도하던 안드레 고메스의 흐름을 끊기 위해 손흥민이 백 태클을 시도했는데, 걸려 넘어지는 과정에서 발목이 90도로 완전히 꺾여버린 것이었다. 비디오 판독 결과 손흥민의 태클이 발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고 넘어지는 과정에서 오른발을 잘못 디뎌 발목에 부상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상황은 아비규환이었다.

고메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간 선수들은 완전히 돌아간 고메스의 발목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고, 손흥민은 얼굴을 감싸 쥐며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으니.

주심은 손흥민에게 옐로카드를 주려다가 고메스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 퇴장을 시켜버렸다. 다행히 발목 수술이 잘 되어 5개월 정도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손흥민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쓸어 내렸던 일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 주변의 고메스
한창 왕성하게 뛰어야 할 축구선수가 축구를 못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안드레 고메스를 보며 나는 원하는 것을 원치 않게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물론 다시 잘 회복하겠지만 아마도 재활을 감당해야 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무언가를 빼앗기는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만나 그로 인해 넘어지기도, 좌절하기도 하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모두가 겪는 과정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를 자꾸만 하나님의 뜻과 결부 시켜 생각해버리는 속단을 하곤 한다. 작게는 어떤 힘든 일을 당한 이에게‘네가 기도를 안 해서 그런 일을 당한 거야’라며 영적인(?) 조언을 하는 일부터, 크게는 ‘하나님이 국민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세월호에 타고 있던 꽃다운 아이들을 침몰시킨 것’이라는 망언을 주일예배 설교로 하는 목사(?)까지.

도대체 언제부터 인생이라는 주제가 이렇게 쉽게 재단되는 것이었던가. 이유도 모른 채 주어지는 여러 모양의 고난과 역경의 과정에서 그저 단순하게 ‘기도하면’, ‘예배에 빠지지 않으면’,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 붙들면’ 역전된다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믿음’으로 둔갑 시켜 기독교를 값싼 종교 놀이로 만들어 버린 현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한데, 마치 고메스에게 찾아가 위로랍시고 “네가 다친 이유가 분명 있을거야. 혹시 최근에 죄를 지었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주님의 경고야”라고 하는 격이다.

우리는 기도로 자신을 무장하면서 동시에 인간미를 잃어간다. 인문학을 잃은 신학은 별다른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우리 주변의 고메스들만 실족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비를 살아내기
이렇게 열두 번째 원고를 낸다. 한 해를 함께 달려오면서 그간 생각해오던 많은 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개인적으로도 참 유익했다.‘너무 늦은 나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나는 나의 리즈시절은 저물었나 싶었지만, 인생을 5년 대출받은 것처럼 도리어 당당하게 살아봤던 것 같다.

늦깎이 회계사로, 턱걸이 비자를 받아 런던에 떠밀리듯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런던의 지하철을 소개하며 기차 안에서 생각의 레시피들을 더 풍성하게 다듬던 기억을 나누었다.

도피성 신학의 길을 가려 했던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각들을 조정하고 지금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섭리라고 부르는 그 시간의 끈이 우리의 생각을 넘어 삶을 인도해내고 있으니 대단하지 않은 하루인 것 같아도 인생은 살 가치가 충분하다는 얘기도 할 수 있었다.

마라톤 같은 인생 길게 길게 보면서 가자고 스스로 이야기해 줄 수 있었던 덕분에 나의 아픈 시절을 지나는 동안 남의 찬란함을 보면서 낙담치 않았고, 다른 사람의 아픈 시절을 위로 삼아 나의 찬란함의 재료로 삼는 일도 빈도를 줄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렌트비와 싸우면서도 나름의 가치의 싸움을 하며 가고 있음도, 미생처럼 바둑돌을 놓으며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음도 확인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이 있었고, 지나간 일들에 아픔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때로는 눈물로 가야만 하는 그 여정 속에서 진주처럼 보이는 신앙의 신비를 나는 보았다. 그것은‘답 없음’이 가져다 주는 신비다.

측 가능’함이 위안이 아니라, 그야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 안개 같은 상황들이 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역설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런던이 그래서 참 특별하다. 마치 애굽으로 보내어진 요셉처럼, 나도 이래저래 섭리 안에 다룸을 받고 있으니.

그렇게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돌아보며 가자. 우리 주변의 안드레 고메스 들을 위로하면서. 그 신비가 계속해서 우리들을 연결해 가고 있음을 잊지 말자.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빨강머리 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