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쳐다 봐! 저건 분명 거인이야.”

30여 개의 풍차를 30명이 넘는 악한 거인이라고 착각한 돈키호테. 그는 풍차의 날개를 거인의 기다란 팔이라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는 창을 겨누고 로시난테를 걷어차며 풍차를 향하여 쏜살같이 덤벼들었다. 산초는 그만 당황하여“앗, 주인님, 아니 기사님! 그게 어디 거인입니까? 그건 풍차란 말이에요. 위험해요!”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으나, 돈키호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풍차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때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팔랑개비를 한번 돌렸다. 산초가 기겁을 하여 뛰어가보니 주인은 흙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이번 호에서 함께 감상할 소설은‘돈키호테’(Don Quixote)다.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Servantes)가 1605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돈키호테란 독특한 캐릭터를 설정함으로써 세계 소설 사상 최초로 “문학 속의 인간”을 창조해냈단 평가를 받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는 시골의 지주다. 기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탓에 정신적으로 이상해지면서 스스로를 기사라고 여기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 만차는 돈키호테가 사는 지역 이름)라고 새로 짓더니, 중세의 기사 복장을 하곤 무기까지 손에 들었다. 돈키호테는 불의에 맞서 기사도를 실현하고, 자신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낸 둘시네아(Dulcinea) 공주 -사실은 이웃에 있는 농부의 딸- 의 사랑을 얻고자 모험을 떠난다.

도중에 마주친 나그네가 “그 기사라는 것이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돈키호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무장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약한 사람들과 가엾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길 가던 돈키호테가 한 여관에 도착하는데, 그곳을 성이라고 착각하여 성주(여관 주인)로부터 엉터리 기사 서품식을 치른다. 여관에서 나온 후 그는 길에서 만난 상인들에게 둘시네아 공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하라고 강요했다가, 늘씬 매를 맞아 큰 부상을 입고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돈키호테가 미쳐버린 것이 기사 소설 탓이라고 여긴 마을 신부와 이발사는 돈키호테의 집에서 기사 소설을 죄다 끄집어내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 책들을 나쁜 마법사가 갖고 갔다고 믿는다.

다음날 돈키호테는 시골뜨기 농부 산초(Sancho Panza)에게 영주를 시켜준다며 설득해 시종으로 삼고 두 번째 모험을 떠나는데, 도중에 풍차를 거인으로 오해하여 달려들었다가 내동댕이쳐지는 유명한 풍차와의 싸움을 벌인다(첫 지문).

이후에도 돈키호테는 양떼를 군대라 여겨 달려드는가 하면, 호송 중인 죄수를 구한다며 경찰과 싸우고, 둘시네아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산에서 고행하는 등 갖가지 사건을 벌인다. 이를 보다 못한 고향 신부와 이발사가 계략을 꾸며 돈키호테를 소달구지에 실어 집으로 데려오지만, 돈키호테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또다시 집을 뛰쳐나가고 만다.

위의 줄거리에서 보듯, 돈키호테는 허황된 기사도의 꿈을 좇는 비현실적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로 하여금 바쁜 일상 속에서 묻어두거나 잊고 있었던 꿈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돈키호테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점은 소설 속에서도 이미 언급되는 얘기이므로 굳이 말을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선 전도서 5:7 말씀을 통해 꿈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정도만 교훈으로 새기고자 한다.“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찌니라.”

돈키호테가 갖는 매력은 그가 꾸는 꿈 자체라기보단,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떠나 모험의 길로 뛰쳐나가는 도전과 용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역사상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누구나 제정신이 아닌 무모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지 여행가 한비야는 ‘꿈꾸지 않는 자, 청춘을 포기했네’란 그녀의 시에서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며 기개를 펼쳤다.

사도행전 26장에선 사도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가 아그립바 유대 분봉왕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함께 듣고있던 베스도 유대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며 비아냥대는 소릴 들어야 했던 것이다.

사실 꿈으로 치면, 성경만큼 꿈으로 가득 찬 책도 다시 없을 것이다. 성경의 첫 장을 열 때부터 펼쳐지는 천지창조의 대역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려는 그분의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예수님의 구원 드라마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이끌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꿈을 심어주어 그분의 일에 동참케 하신다는 은혜로운 사실도 가르쳐준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이 소설에서 돈키호테와 그의 팀은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나 보잘것없는 신세였다. 그 자신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되 변변한 검술을 갖추지 못했고, 그의 말 로시난테는 볼품없이 삐쩍 여위었으며, 시종 산초는 시골 농부 출신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돈키호테는 자신에 대해 “이 혐오스러운 시대에 황금의 시대를 소생시키기 위해 하늘의 뜻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기사”란 자부심을 가졌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적 기준으론 그랬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의 일이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사도행전 1:8)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예수님이 명령하시며 제자들의 작은 가슴에 큰 꿈을 품게 하실 때, 당시 그 명령을 직접 받은 제자들은 학문없는(사도행전 4:13) 어부 출신을 포함한 11명의 패잔병 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11명의 제자와 더불어 마가 다락방에 집결한 120 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시며 요엘서의 예언과 환상과 꿈(사도행전2:17)이 주어지자, 그들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복음이 땅끝까지 뻗어가더니 결국 세계의 패권국인 로마까지 뒤집고 말았다.

그 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어찌 되었는가? 놀랍게도 교회는 오늘에 이르러 미전도 종족의 마지막 리스트를 가슴에 품고 릴레이 결승점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비록 세상의 눈엔 허황되게 보이는 꿈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일 땐, 그 꿈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돈키호테같은 그리스도인이 더욱 늘어나게 되길 소원해마지 않는다.

혹여 독자들 중에 형식과 틀에 갇힌 신앙생활이나 상식적인 교회 분위기로 인해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눌러왔던 분들이 계신다면,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줄 청량음료같은 책으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를 강추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