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리즈’ 시절, 바로 지금

유 퀴즈 온 더 블럭(You Quiz on the Block)은 유느님으로 불리는 유재석과, 예전에 양배추로 활동하던 조세호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직접 찾아가 이런저런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고 문제를 내 맞히면 현금 백만 원을 주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길거리 토크쇼이다.

작위적으로 누군가를 출연시켜 억지 감동을 주려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그저 평범한 시민들을 지나가다 만나면 말을 걸고, 쉽지만 나름의 철학이 서려 있는 질문들을 던지며 삶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하는 그런 소소한 감동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지난주 방송에서는 추석을 맞아 인삼과 한우로 유명한 경북 영주시 소재 풍기읍을 방문했는데, 마지막에 출연한 장병순 할머니와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한 30년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계시는 할머니는 추석이 되면 아들 둘, 딸 넷에 손주들까지 모두 와서 앞마당이 차로 꽉 찬다며 흐뭇해하시는데, 자식들이 며칠 있다가 가면 그래도 약간은 허전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에“서운하죠, 보내놓고 울어요”라는 대답에 괜히 마음이 찡긋했다.

‘자녀들에게 계속 짐짝이 되는 것 같다’고 인터뷰 내내‘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하신다. 집안 사정과 그분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싶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제천에서 시집와서 여든이 넘기까지 풍기에 살고 있는 장병순 할머니. 누리는 것에 너무 인색한 듯이 아쉽고 후회가 가득해 보였다.

한번 사는 인생이기에 지나온 일에 후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 우리의 인생이 정말 밤중의 한 경점같이 느껴진다.

아아, 나의 리즈 시절이여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유럽 최강 클럽으로 군림하던 축구팀이다.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주의 ‘리즈’라는 도시를 연고로 하는 팀으로, 1990년대까지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가 팀 형편을 생각지 않고 무리한 영입을 한 끝에 재정 파탄으로 주축 선수들을 팔면서 성적이 떨어져 하위 리그로 몰락했다.

프리미어 리그(1부리그) 재입성은커녕 3부리그까지 내려갔으니 회복이 요원하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특정 인물, 또는 어떤 이의 과거 전성기 시절, 좋았던 시절 등을 의미하는 은어가 되었다.
아마 예전에 쓰던‘내가 왕년에 말이야’같은 표현과 의미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면“유승준이 리즈 시절에 군대만 다녀왔어도…”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된다.

돌아보니 우리 모두 한때는 정말 잘나가던 리즈 시절이 있었던 것만 같다. 돌도 씹어 먹을 만큼 에너지 넘치던 그런 시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런 열정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지금 내가 앉아있는 오늘의 자리와 상황이 얼마나 초라하고 쪼그라들었는지 놀란다.

시간은 우리에게 잔인하리만큼 가차 없이 흘러간다. 모르는 사이에 새치도 조금씩 늘어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한 대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부와 젊음을 맞바꿀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한 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포기와 절망이 문턱 앞에 찾아와 손짓하는 하루하루를 대면한다는 것이 어떤지 우리는 적어도 한 번씩은 모두 경험해 봤을 테니깐.
광음여류(光陰如流), 흐르는 물과 같이 세월은 한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으니.

지금 이 순간의 역설
그렇게 우리의 리즈 시절은 저물었나 싶고, 그렇게 우리의 전성기는 끝나고 철들면 무덤 앞인가 싶은 아쉬움 가득한 오늘을 마주 앉아 있지만, 그렇다고 내일의 일까지 포기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닐까.

나는 늦은 나이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체력적으로 우월했던 젊은 시절 뉴질랜드에서 달리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막심이지만, 그래서 아마 다시 뛴다는 상상만으로도 더 부담이고 못 할 것만 같았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이제 다시 시작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나 싶은 마음들을 어르고 달래며 스스로와 싸웠던 것 같다.

거의 매일매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동네를 4km씩 뛰면서 몸의 변화를 직접 느끼기 시작했고, 나는 달리는 것 자체의 기쁨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왕립식물원(큐 가든 Kew Garden)에서 열린 10km 단축 마라톤도 48분 만에 완주할 수 있었다. 좋은 성적을 기대는 했지만 사실 완주에 의의를 두고 큰 욕심은 없었는데 함께 뛴 오천 명의 참가자 중에서 445등으로 들어왔다. 큰 성취감이 있었다.

‘리즈 시절’이나 회상하며 접어 두었다면 지금의 이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아찔함이 아직 느껴진다.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지금 아니어도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 사실 시간이 더 흘러 버리면 다시는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한 잔의 맛있는 커피를 마실까 말까 하다가 그냥 지나치는 일부터,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이야기하는 일까지. 시간을 우리의 영역 안에 가둘 수 없기에, 우리는 그 제한 속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엄마와의 짧은 영상통화 끝에‘사랑한다’고 말하는 일 같은, 소소한 일인데도 입이 잘 떼어지지 않는 그런 말들을 용기 내 건네보는 그런 일 말이다. 그것이 그날 잠시 복받쳐 오른 감정과 분위기에 기대서였든, 어제 시청한 유 퀴즈의 감동에 기대서였든 무슨 상관이랴. 조금은 민망해도 사랑한다고 말한 뿌듯한 이와 결국 말하지도 못하고 후회하는 이만 남을 뿐이니.

아무리 물리적으로 멀어도 버튼 몇 번만 누르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요즘 같은 세상인데 지금 당장 카톡을 열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건 어떨까.

당신에게 풍족히 해주지 못했다고 항상 미안해하는 그 영웅들에게. 사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고도 여전히 미안해하고 있는 그 영웅들에게 말이다. 오늘의 선택을 놓치지 말자. 이렇게 점점 더 완숙해져 간다면, 우리의 리즈 시절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인지도.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슬램덩크 명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