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선배들의 지나온 발자취를 살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아직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초기 이민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민 생활이 매뉴얼이 있는 가전제품처럼 확실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정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런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민자는 본인이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시행착오를 통과하면서 뉴질랜드를 배우며, 이민을 배우고 사람을 배워간다.
이민이라는 삶을 선택함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 때문에 마음이 맞는 서너 가정이 함께 모여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이민의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한국음식을 함께 만들어 나누어 먹고, 삼겹살을 굽고 맥주와 소주를 곁들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즐거운 담화 속에 아이들의 즐거운 재잘거리는 소리, 한국의 정치와 여러 뉴스거리 등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쌓아나간다.
하지만 사람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일어나는 법, 작은 말과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오해가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영원할 것만 같았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밀했던 관계가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더 좋았을 관계로, 마음을 주고 정을 주고 시간을 함께했던 그 귀한 관계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되어버릴 때 건강한 관계를 세워나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된다.
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용기 있는 한 사람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먼저 손을 내밀어 본다. 용서를 구해보기도 하고 오해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관계는 예전과 같아지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오해가 풀렸다면 성공이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서로 뜸해지다가 결국은 멀어지게 된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힘든 이민 생활 속에 위로와 힘을 얻으려고 맺었던 관계가 도리어 상처와 아픔만을 남긴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하드웨어에 새로운 운영체제가 필요하듯, 이민 생활에 맞는 새로운 관계 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관계를 세울 수 있을까?
첫째, 가족과 남이라는 경계선을 정확히 해야 한다
남은 남이고 가족은 가족이다. 특별히 이 선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모호해질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형제요 자매요 영적인 한 가족이지만, 핏줄로 하나 된 가족과 신앙으로 하나 된 가족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으로 상대방을 대하다가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둘째, 사업과 비자, 그리고 금전적인 부분에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알던 관계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비즈니스를 운영하면 서로 다른 두 기대로 인해 관계가 크게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서로의 배우자가 그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요, 깊은 관계를 쌓았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공인된 변호사를 앞에 두고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계약서를 통해 본인의 기대와 상대방의 기대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셋째,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비교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비교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
보통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모인다지만 나보다 누군가가 더 빨리 비자가 해결될 때, 혹은 갑자기 잘 풀려 재정 상황이 나보다 더 좋아질 때, 혹은 나의 자녀보다 남의 자녀가 더 잘 되는 것 같은 비교의식이 생길 때 관계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랑을 하는 사람이나 질투를 하는 사람이나 비교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웃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축하를 받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이웃을 더 많이 섬기라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행하면 좋을 것 같다.
넷째,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확실하게 No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No를 듣더라도 섭섭해하지 말아야 한다
Yes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No라고 이야기하기도 그런 애매한 부탁이 올 때,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때로는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다.
처음에는 무안하고 어색해지는 것이 나중에 No 하지 못함으로 인해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마음에 부담을 안고 가거나, 해준다고 하고 못 해줘서 상대방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Yes면 Yes, No면 No.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은 모두를 피곤하게 만듦을 기억하며 No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다섯째, 지키고 싶은 비밀은 지켜줘야 한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전하지 않는 것이 관계의 신뢰를 두텁게 쌓는 길이지만, 혹시 다른 이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는 소식이라면 당사자에 그 소식을 전해도 되는지 혹은 된다면 누구에게 그리고 어디까지 전해도 되는지의 여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또한 그 정보를 본인이 직접 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삼자에 의해 전할지를 물어보는 것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배려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여섯째, 나에게 당연한 것이 남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해줘야 한다. 나의 자녀의 취침 시간이 다른 집 자녀의 취침 시간과 다를 수 있다.
나의 자녀교육 방식이 다른 집의 방식과 다를 수 있다. 나와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판단하거나 남에게 뒷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뭔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상황과 여건을 서로 이해하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세우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 뒤에는 작은 뒤뜰이 하나 있다. 조금만 관리를 안 하면 어디서 나오는지 무성하게 풀이 자란다. 그 중에 줄기 하나가 나무를 타고 꽈리를 틀며 올라가는데 독을 품은 참외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이 풀의 특징은 뿌리를 뽑으면 하얀 우윳빛 액체를 뿜어내는데 손에 묻으면 한참 씻어야 겨우 없어진다. 그리고 뿌리를 뽑자마자 금방 시들어 말라 죽어 버린다.
필자는 관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공을 들이지 않고 저절로 생긴 관계, 마음을 쏟고 서로 돌봄이 없는 관계는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상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며 서로 이야기와 추억을 쌓는 가운데, 신뢰가 세워지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여러 오해의 골짜기를 통과한 관계는 어떠한 오해의 폭풍과 상처의 비구름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세우기 어렵고 아름답게 키워나가기 힘들지만 척박한 이민 환경 속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의 열매를 맛보고 누리는 이민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