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딤즈데일 목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헤스터,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소?”
“당신은요?”
“난 절망의 끝을 달리고 있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것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나요?”
“그건 헛된 일이오. 나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되면 순식간에 나를 경멸하고 말 거요.”
“당신은 뼛속 깊이 뉘우쳤어요. 당신의 죄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에게서 떠났어요.”
“아니요, 헤스터! 그렇지 않아요. 나는 고행은 참 많이 했소. 그러나 참회는 하지 못했소. 목사의 신분을 벗어던질 망정, 사람들 앞에 나서서 진정으로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건데. 헤스터, 당신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으로 1850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청교도의 도덕률이 사회를 지배하던 17세기 미국의 보스턴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여주인공 헤스터(Hester)는 간통으로 아이를 갖게 되어 그 때문에 감옥까지 갔는데도, 상대가 딤즈데일 목사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녀는 평생 간통, 간음을 뜻하는 ‘A’(adultery)자의 주홍글씨를 옷 가슴팍에 붙이고 살아야 하는 형을 선고받는다. 헤스터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사회가 내린 벌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딸 펄 (Pearl)만을 바라보며 순결한 생활을 지켰다.

거기에다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았다. 전염병이 마을에 퍼졌을 땐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병자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미 용서되었고, 어느덧 사람들은 주홍글씨 A를‘유능한’이란 뜻을 가진 Able의 첫 글자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딤즈데일(Dimmesdale)은 목사로서의 신분과 명성에 갇혀 차마 자신이 간통상대란 사실을 밝힐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죄책감에 찌든 삶을 살았다. 죄의식이 깊어지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런데 그럴수록 주일설교는 더욱 간절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원래 헤스터는 유럽에서 칠링워스(Chillingworth)라는 늙은 의학자와 애정 없는 결혼을 했었다. 남편보다 먼저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왔는데, 곧 뒤따라온다던 남편이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끊겨버린 사이에 헤스터가 딤즈데일 목사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뒤늦게 보스턴으로 온 칠링워스는 아내의 간통소식을 접하자 복수심이 치밀었다. 상대가 딤즈데일 목사란 사실을 눈치채고선 복수를 꾀한다. 딤즈데일의 주치의를 자청하고 한 집에 살며 지근거리에서 죄책감을 자극하며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이란 사실은 철저히 숨겼다.

보다 못한 헤스터가 칠링워스의 정체를 딤즈데일에게 밝힌다. 둘은 보스턴 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하지만, 끝내 딤즈데일은 도피 대신 속죄의 길을 택한다.

속죄의 장소는 광장 처형대였다. 뉴잉글랜드의 총독 취임 예배 직후, 교회에서 설교를 마친 딤즈데일이 광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처형대 앞에 멈춰선 그는 군중 속에 서있던 헤스터와 펄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올라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처형대에 올라선 딤즈데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앞에 큰 죄인이 서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분을 속인 채 살아왔습니다. 헤스터의 주홍글씨를 봐 주십시오. 저 주홍글씨는 내 가슴에 있는 낙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딤즈데일은 자신이 헤스터의 숨겨진 간통 상대였다고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의 옷에서 넓은 깃을 떼어내자 많은 사람들이 “아니, 저건!” “저럴 수가…”하며 탄성을 지른다. 그의 맨 가슴에 ‘A’자의 낙인이 찍혀있었음이 암시되는 장면이다.

최후의 고백을 마친 딤즈데일이 처형대에서 쓰러져 죽어간다. 함께 따라 올라왔던 칠링워스가 넋이 빠진 모습으로 뇌까렸다.“결국 내게서 이렇게 도망치는군.” 복수의 대상을 잃어버린 칠링워스 또한 얼마 못 가 죽게 되고, 헤스터와 펄 모녀는 영국으로 건너간다.

세월이 흐른 뒤 헤스터는 다시 보스턴의 옛적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이 마을엔 이름 모를 무덤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가 남아있었다. ‘주홍글씨 A’

소설 ‘주홍글씨’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죄를 대하는 두 마음을 대비시켜주고 있다. 이름하여, 칼의 마음과 메스의 마음이다. 칼은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까지 미워하는 마음이고, 메스는 죄를 미워하되 죄인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먼저 이 소설에 기술된 청교도 신앙에 대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교도 신앙은 사실 매우 교훈적인 것이다.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거부하고, 삶의 일상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실질적으로 살아내도록 독려하는 신앙이다. 이것이 건강하게 작동될 땐 믿음생활을 올바로 견인하는 훌륭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율법주의의 곁길로 빗나갈 땐 종교적 규율로 사람을 옭아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데, ‘주홍글씨’는 그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목사, 재판관, 마을 주민들은 율법의 칼로 헤스터를 단죄했다. 그들은 헤스터의 옷에 주홍글씨의 ‘A’자를 새겨 넣음으로써, 죄를 처벌하여 죄인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교정의 차원을 넘어 죄인의 인생 전부를 파괴해버렸다. 그들은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여겼지만, 요한복음 8장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교훈을 가르쳐주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 여인을 돌로 칠지 어떨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두 물러가버리자 예수님이 홀로 남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11)

이 사례에서 예수님이 간음의 죄를 용인하신 게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다. 그럼에도 예수님께는 죄에 앞서 죄인 된 여인을 용서하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 용서 이후 여인은 죄를 이길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는 메스였다. 죄인에게서 죄를 도려내고 새 삶을 꿈꾸게 하시는….

이 작품에서 우린 회개를 배운다. 헤스터의 삶과는 달리, 죄를 숨겼던 딤즈데일의 나날은 지옥 그 자체였다. 딤즈데일에게 천국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광장 처형대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한 바로 그 최후의 순간에 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38에서 “너희가 회개하여….죄사함을 얻으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그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회개의 문을 열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1:18에서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대언했다. ‘주홍글씨’의 17세기 보스턴 청교도들은 주홍 같은 죄를 눈처럼 희게 만드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린 어떤가. 우린 칼의 마음인가, 메스의 마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