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민자와 한국에서 새로 온 이민자가 타국에서 만났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하고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어느 부분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묘하게 두 이민자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같은 시기에 온 이민자들 사이에서 서로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이민 연수가 있는 사람들과 이제 갓 이민을 시작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더 쉽지 않다.
이민의 특성일까 한번 삶의 루틴이 정해지고 관계의 길이 닦이면 그 길을 벗어나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걸어 볼 기회가 얻기 힘들다. 따라서 항상 같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 같은 사람들만 보다가 새롭게 이민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호기심과 안쓰러운 마음 그리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선배 이민자들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고 부탁하지 않은 도움으로 인해 오해가 생겨 차라리 도와주지 않았었더라면 더 좋을 뻔할 상황들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일들이 자꾸 반복해서 일어나고 복잡한 관계에 치이다 보면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그리고 가족하고만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이 되는 법, 혼자 그리고 가족과만 관계를 맺게 되면 결국은 고립되기 쉬운 이민 사회 속에서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변하고 사람이 치유되는 것도 역시 사람을 통해서 치유되기에 관계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작은 이민 사회, 관계가 한번 뒤틀리기라도 하면 어쩌다 마주치는 것도 곤혹이다. 차라리 안 보고 살면 편하겠지만 한 다리 건너 다 이어지는 좁은 관계망 속에서 관계가 안 좋은 사람과 서로 마주치지 않고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불편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나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의 친구가 나의 베스트 프렌드일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며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을까?
우선 첫 만남 때에 아무리 호기심이 일어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비자는 어떻게 되세요?” “한국에서 뭐 하셨어요?” “렌트비 얼마나 내세요?” “연봉이 어떻게 되세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났어요?” “애는 왜 갖지 않으셔요?” “아이들이 왜 터울이 이렇게 많이 나요?” “왜 아이를 하나 더 낳지 않으세요?”라는 등의 개인적인 질문들은 초면에 삼가는 것이 좋다.
이런 질문들은 최소한 어느 정도 긴 기간 동안 서로 알아가며 밥도 몇 번 사주고 집으로 초대도 하고 초대도 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 들어야 하는 개인사이다.
더욱이 이런 질문을 다 쏟아놓고 상대방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정작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을 때 처음 본 사람에게 이 질문을 듣고 얼떨결에 그 질문에 답한 사람은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개인사들이 정말로 궁금하다면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눈 후에 조심스럽게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하면서 정중하게 상대방의 의중을 묻는 것이 서로의 첫 만남을 아름답게 시작하는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또한 이런 질문이 집요하게 들어올 때 싫은 티를 내며 너무 팍 인상을 쓰기보다는 그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네, 네” 하며 “렌트비는 다른 사람들 내는 것만큼 내고, 연봉은 다른 사람들 받는 것만큼 받아요.”라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도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지 않고 대화를 끝맺는 방법 중 하나다.
관계가 무르익어 갈 때 더욱 주의를 기울여 서로 조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지 말아야 할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부탁은 대부분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는 부탁들인데, 소중한 관계일수록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부탁이 바로 돈을 꾸어달라는 부탁이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순간 그 관계는 위태롭게 될 수 있다. 누군가 돈을 꾸어달라고 할 때 차라리 그 자리에서 욕을 먹을지언정 꾸어주지 않는 거절의 한마디가 시간이 지나 소중한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부탁을 하지 않고 은행이나 제3금융권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자를 낼 만한 힘조차 없는 경우라면 그 사정을 아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누가 줬는지 모르게 돕는 것이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토양이 된다.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나와 내 가족 하나도 서로 의지해가며 살아가기가 힘든데,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의“No”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 동기가 선하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을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피해요, 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차를 빌려달라고 하는 부탁도 상대방에겐 부담을 줄 수 있다. 아무 일이 없으면 상관없지만 사고가 나거나 혹은 보이지 않던 스크래치라도 나기라도 하면 그 이후 관계의 정산이 참으로 복잡해진다. 차라리 서로 부담이 없도록 돈이 들더라도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 관계를 깔끔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부득이하게 빌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보험 관계를 철저히 하고 렌터카를 빌리는 가격에 맞추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사례를 하는 것이 빌려준 사람의 마음을 어렵게 하지 않는 길이다.
한국에 방문할 때 택배 부탁 역시 자제해야 한다. 이민자가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적 총알 장전이 필요하다. 또한 뉴질랜드의 힘겨운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 한국에 오래 머물 수도 없다.
한국에 있는 시간은 뉴질랜드에서 시급을 계산하듯 금 같은 시간들이기에 그 시간을 본인의 택배를 위해 소비해달라는 부탁은 부탁 받는 사람 입장에서 굉장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필자 같은 경우에 택배나 짐 부탁은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힘들게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본전도 못 찾는 부탁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부탁이 바로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이다.
혹여나 힘들게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부탁을 한 사람보다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더 미안해진다.
비싼 돈을 내고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 신뢰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공짜로(?) 맡기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는 훨씬 좋은 길이지만, 그 이후에 아이를 맡긴 부모의 후속 조치가 아이를 봐준 사람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다른 집에 내 아이를 맡겼다면 다음 번엔 내가 그 집의 아이를 돌봐주는 것이 맞다. 또 아이를 맡길 때에 본인의 아이가 먹을 간식과 과일 그리고 음식을 두둑이 함께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혹은 돈을 지불하지는 않더라도 아이를 봐주는 데 있어서 감사의 표시로 김치를 몇 포기 담아 보내던가 작은 선물을 전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고 계속 아이를 맡기기만 하면 아이를 맡아 주는 입장에서 그 동안 아이를 봐주면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엉뚱하게 어떤 시점에 분노로 표출되면서 소중한 관계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관계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의 가족이 할 일은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힘들더라도 본인의 가족이 감당하는 것이다. 돈을 지불하면 해결될 일을 그 돈을 아끼기 위해서 관계를 통해 공짜로 아니면 아주 값싸게 해결하려는 마음이 결국 소중한 관계를 상하게 만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예상치 못하게 관계가 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고 내가 받은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값없이 흘려 보냄으로 소중한 관계가 지켜지고, 아름다운 관계가 세워지는 이민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