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다

지난해 우리 교회에서 가졌던‘전교인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 교제 순서를 진행하시던 부목사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나만 가지고 있을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나눠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참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왔고 순리대로 살아왔으며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기에 내 인생에는 별다른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들에게는 없는 나의 경험을 하나둘 꼽아보니 그 수가 꽤 되더군요. 게다가 옆에서 제 아내가 저도 잘 기억하지 못하던 ‘유별난 기억’들을 상기시켜주는 바람에 그 목록이 끝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제 아내와 저는 제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무려 35년!

아주 어렸을 때, 시내 극장 2층에서부터 1층 스크린 앞까지 시멘트 계단을 굴러 내려갔던 것. 초등학교 다닐 때 아파트 입구에 서 있다가 4층 높이에서 동생이 던진 콘크리트 조각에 맞아 병원 갔던 일. 중학 시절 아침 자습시간 여학생반에 폭죽을 터뜨렸던 일 등등.

그 중에서도 모두를 올 킬 시켰던 일은, 직접 제작, 편집한 7분짜리 단편영화를 Hoyts 극장에서 상영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버스운전을 하기 전에 ARA institute에서 비디오 편집과정을 1년간 공부했는데, 그 과정의 졸업작품이었기에 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었지요.

그 비디오 편집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한 친구가 현재 영화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급하게 동양인 단역배우들이 필요하다며 저에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영화 출연이라는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운전과는 연관이 없지만 이 특이한 경험을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아카로아를 향하는 길에 반드시 정차하는 Little River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아카로아로 향하는 철도의 종착역이었는데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그냥 작은 마을로 남게 된 동네이지요. 이 리틀리버 인근의 어느 한적한 캠프장에 영화 촬영세트장이 마련되었습니다.

‘The Stolen’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요, 골드러시 시절 뉴질랜드 남섬이 배경이 되는 영화로 유럽과 뉴질랜드 합작영화였습니다. 주연배우는 Alice Eve라는 할리우드 배우로 주연급 배우는 아니지만 맨인블랙과 스타트랙 시리즈에서 활약했던 여배우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중국인 광부 역할, 단역 중의 단역이었죠, 영화 전체에 한 두 씬 나올까 말까 하는…

영화 촬영 전 저는 제작 측으로부터 깨알 같은 영어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촬영장의 안전에 대한 정보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말과 마차가 나올 것이고, 총소리가 날 것이다’와 같은 디테일과 이에 대한 대비 등 친절한 정보들이 있었습니다. ‘작업장(촬영장)에서는 일과 성과보다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겨울 속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속의 촬영장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영화 내용 자체가 무겁고 암울한 탓인지, 날씨 탓인지 촬영장의 분위기는 아주 차분했습니다. 영화 촬영에 동의(내 얼굴이 영화에 나오게 되며 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내용)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단역배우 본연의 역할에 들어갔습니다.

대기! 단역배우는 기다림이 그 기본이라지 않습니까? 가건물에 마련된 단역배우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중 스텝의 안내를 받아 의상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곳엔 1900년대 전후의 뉴질랜드인들의 의상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고 단역 배우답게 버스 한 켠에 마련된 간이 탈의실에서 제법 그럴듯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다음은 분장. 오랜 토굴과 오두막 생활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그 옛날 중국이민자들의 모습으로 분장을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분장만 했는데, 분장 담당자가 저에게는 수염이 어울릴 것 같다면서 수염 부착을 주문했습니다.

처음엔 보조분장사가 수염을 붙여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메인 분장사가 저를 부르더군요. 그렇게 저는 분장담당자를 따라 분장 차에 올랐습니다.

주요 배역들만 오른다는 그 분장 차! 분장버스 안에는 분장할 배우들을 위한 화장대 3개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전문 분장을 위한 완벽한 시설이 갖춰진 분장 버스를 처음 보았습니다.

말로 듣고 글로 읽어 대충 분위기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차에 오르니 이제 막 상경한 시골 청년처럼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습니다. 안내를 받아 앉은 제 자리 옆엔 주연배우! 영화 사이트와 포스터에서 봤던 그 주연배우가 제 옆에 앉아 분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사진 한 장 같이 찍고 싶었지만, 분장 중이라 움직일 수가 없었던 데다 시간이 촉박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분장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분장사는 제게 이 수염도 붙였다, 저 수염도 붙였다 여러가지 시도를 해 보았고 붙인 수염을 가위로 다듬고 매만지며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더군요.

그런데 속으로 이 상황이 좀 웃겼습니다. 아니, 제가 주연배우도 아니고 화면에 클로즈업이 될 것도 아닌데, 뭘 이리 공을 들이나 싶었죠.

‘혹시, 캐스팅 담당자가 날 보고 인물이 그럴 듯 하니 클로즈업 하나 따자고 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런 일은 없었지만요. 아무튼 긴 시간 분장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인 촬영장 대기 텐트로 이동하여 본연의 임무에 다시 돌입했습니다. 대기!

드디어 촬영. 제 역할은 도망가는 여주인공을 향해 총을 쏘는 악역의 뒤로‘뭐 하는 짓이야?’를 중국어로 외치며 등장했다가 그의 위협에 다시 숨는 역이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촬영에 혼신을 다해 연기했습니다. 어릴 적 중국 영화를 보며 따라 해 보았던 중국어 ‘뭐 하는 짓이야?’를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혼신을 다한 저의 연기는 목소리와 함께 개봉 판에 실렸고 정확하게 영화의 1시간 24분 40초 지점에 약 2초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재밌는 것은 그렇게 열심히 분장했던 제 얼굴은 흐리게 줌 아웃되어 잘 보이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사만큼은 정확하게 들리더군요.

촬영장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집들이 아니어서 굉장히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비가 내리고 기온이 낮은 산속이라 상당히 추웠지요. 땅이 젖어있어 어디 딱히 앉아 쉴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추위에 덜덜 떨고 있던 그때, 촬영진행요원들이 촬영장에서 대기 중인 단역 배우들에게 온수로 채워진 핫 팩을 나눠주었습니다. 단역 배우들은 역할의 비중 때문에 홀대 당할 거라 생각했던 제 생각이 보기 좋게 엇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주연배우는 더 좋은 환경에 있었겠지만 기대하지 못한 서비스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지요. 핫 팩 뿐 아니라, 온수와 따뜻한 차와 커피도 제공되었습니다. 단역배우가 일회성 소모품이 아닌 인격체로서, 영화제작의 구성원으로서 존중 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버스도 마찬가지이거든요. 요금을 내고 버스에 오른 이들은 모두가 공평한 서비스를 제공받습니다. 그들이 가진 조건 때문에 서비스가 달라지지 않지요.

저는 이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믿습니다. 저는 촬영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뉴질랜드가 그래도 각자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공정한 환경이 제공되는 건강한 사회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촬영장의 경험을 통해 기본에 충실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의 완성보다는 개인의 인격과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어서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기본에 충실하여 구성원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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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진
침례신학대학교 졸업.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교육부서 담당 및 문화사역. 2014년부터 레드버스에서 드라이버로 일하고. 영상편집자로 활동하면서 현재는 성가대지휘자로 섬기고 있다. 사역자와 이민자로서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적용하며, 겪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