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목양은 분명 하나님의 일인데 왜 사람 얘기냐? 하실 것이다.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와 최고의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시지만 교회 안에는 실제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생김생김, 성격, 기질, 출생과 성장의 배경, 관심사와 관심도, 라이프스타일 등을 모아보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민 사회 속의 이민 교회는 그런 부분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 개성이 진짜 그 사람의 특질이 될 수도 있고, 잘못하면 개성(犬性)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괜찮은 조직과 괜찮은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먼지 풀풀 나는 공사판과 같다. 이민 교회에서 그런 특별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일꾼이 되도록 훈련하고 섬기며 목양해야 하는 목회자는 더 특별해야 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다 보면 전체는 물론이고 개인의 모습까지 들어온다. 때로는 그 심령까지도 읽혀진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목회적 관점에서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완전한 판단이 아니기에 늘 겸손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 목사의 눈에도 안 차는데 어찌 하나님의 마음에 찰 수 있겠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외도하거나 비틀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언 25:13)는 말씀처럼 목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 되시니까 아무 문제없이 다 알아서 하실 것 같아도 하나님은 교회를 경영하심에 있어서 교회 안의 사람들을 자유 방목하신다. 목회자로서 교회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그 스케일과 디테일을 겪으면서 자주 입이 벌어지고 자주 웃게 된다. 정말 통 크신 하나님의 손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크시고 때로 정말 작은 부분까지도 살펴주실 때는 감사와 그 감사로 인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목회는 그 하나님의 일들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목사에게도 사람 통한 기쁨은 크다.
목회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좋은 사람, 믿음 있는 사람을 만나고 얻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 입에 먹을 것 들어가는 것 보면서 좋아하는 것처럼 목사의 마음도 똑같다. 자식이 부모 마음 알아주면 그게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은 것처럼 교인들이 목사의 목회 철학을 공유하고 함께 짊어지면 그게 참 좋다. 목회자와 교인의 소통과 합심은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지혜가 필요하다. 교인들은 “목사(사택)를 가까이 하면 상처 받는다”는 말을 한다. 목회자와 뜻을 같이 하다 보면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다가 인간적으로 보는 시각이 커지기 시작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까워짐 속에 멀어짐의 불씨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흉허물 없이 가까워지면 멀리서 볼 때는 보이지도 않던 점같이 작은 흠들도 함께 보인다. 좋을 때는 다 좋은데 사람인지라 마귀가 개입하여 틈새가 벌어지면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서 좋았던 것은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흉과 허물이 된다.
목회자와 그 가정의 이야기들은 감추어야 하거나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가까이 있고 늘 오고 가던 사람들이 말을 퍼서 옮기면서 말 거리가 되기도 한다. 목회자들이 사람을 가까이하면서도 또한 일정 거리를 두려고 하는 이유이다. 누가 나빠서가 아니다. 혹시라도 서로 치명적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목회자는 물론이고 교우들도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
목사 역시 교회 안에 속한 한 사람이다. 목사의 일은 거룩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일이지만 눈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는 대상이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목회의 동력이고 또한 걸림돌이다. 세상 어디든 해결도, 문제도 그 맥락의 가운데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다. 사람이 열쇠이고 사람이 또한 자물쇠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사람을 하나 얻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고 사람을 잃으면 그게 또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이 아프다.
전에 동료 목사와 목회적인 일들을 나누다가 “목회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이 들어오면 더 나을까 싶어 가까이 하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목회 일선에 선 모든 목회자와 사모들이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 말이 적합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겪으면서 받은 아픔과 상처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바람이 강하다 한들‘사람 바람’보다 더 강하랴. 물론 교인들도 각각 다른 입장과 각도에서의 아픔과 상처가 있겠지만 교인들은 목사와 사모의 아픔은 당연한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목회는 사람 없이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사람이 싫어지면 어떻게 하나?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러워지면 어떻게 하나? 여기에 사람을 믿어야함과 믿을 수 없음에 대한 목회자의 갈등과 큰 기도제목이 있다.
엘리야가 이세벨 왕후에게 쫓길 때 “다 죽고 나만 남았거늘”이라는 그 말에 우리 목회자들의 심정이 다 들어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봐야 목회에 눈을 뜨게 된다. 교회와 목사, 그리고 목회적 이해에 대한 교인들의 지독한 무관심과 매정함, 그리고 냉담함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약하지 않다. 하지만 교인들이 마음 아프게 했을지라도 그건 교인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약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것을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목마름을 갖게 된다. 목회에 있어서 사람이 답이지만 사람 위의 진정한 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그런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그들과 하나되어 함께 한다는 것에는 목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사람이 많다고 일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다고 일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어떤 분들은 “목사님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데 돈이 아니다. 교인으로서 목사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고 함께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힘을 보태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목사는 교인을 위해 늘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목사를 통해 펼치시고자 하는 그 꿈을 이해하고 공유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함께 짊어져야 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건전한 판단력과 보편적인 상식을 잃지 않고 더 나아가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사람과 사물을 볼 수 있다면 건강한 교회다.
건강한 교회는 강한 교회가 된다. 강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심으신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 힘껏 달린다. 가슴이 까맣게 타 들어간 뉴질랜드의 이민 목회자들과 버겁고 벅찬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