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잠시 후, 사내의 몸에서는 굉장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몸집이었던 사내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더니 갑자기 얼굴이 거무스레하게 변하다가 눈과 코, 입이 녹아내리며 모양이 달라졌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수없이 하나님을 불러대는 내 앞에 전혀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헨리 지킬박사였다.”

영국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e Stevenson)이 쓴‘지킬 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의 한 장면이다. 소설의 원제는‘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으로 1886년에 출간되었다.

지킬박사는 의학박사요 법학박사, 그리고 영국 학사회의 회원인 저명인사다. 근데 자그마한 몸집의 사내가 변해 지킬박사가 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위의 지문에서‘나’래니언
(Lanyon)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지킬박사로 변한 그 사내의 이름은 하이드(Hyde)다. 래니언과 더불어 지킬박사의 친구인 어터슨 (Utterson) 변호사가 하이드와 지킬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나섰다.

“그 자가 하이드(hide, 숨다)라면, 나는 시크(seek, 찾다)가 되겠다.” 숨는다는 단어(hide)가 하이드 (Hyde)와 발음이 같아 어터슨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메시지는 현실적이다. 선과 악을 둘러싼 인간의 이중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이 소설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먼저 사건의 경위를 잠시 알아보자. 지킬박사가 유언장을 작성해 어터슨 변호사에게 맡겼다. 어터슨은 지킬의 유언장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자기가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면 하이드라는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하이드란 이름은 지킬의 오랜 친구인 어터슨에게 조차 생소했다. 혹시 하이드라는 청년의 협박으로 이 유언장이 작성된 건 아닐까? 어터슨은 둘의 관계를 캐기 시작한다. 어터슨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했다.

지킬 박사의 엉뚱한 발상이 화근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서 선과 악을 분리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인격을 둘로 나누는 약을 개발하려 했다.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성공한다. 지킬은 그의 고백서에서 자신의 실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밝히고 있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는 선과 악을 서로 떼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그렇게만 된다면 선은 악의 방해를 받지 않고…마음껏 선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악은 선의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껏 악행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지킬은 이제 약만 먹으면 악한 하이드로 변신한 뒤, 다시 약을 먹으면 선한 지킬 박사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지킬은 큰 키에 훈남이었다. 반면 하이드는 오랫동안 악한 본성을 억제해왔던 탓에 찌그러진 얼굴에 난쟁이만한 키였다. 지킬은 하이드란 별개의 인생을 통해 악행을 범하고도 존경받는 지킬박사의 삶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완벽한 이중생활이었다.

시편 36:2이 말하는 죄인의 삶 그대로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하이드의 악행은 무자비한 ‘묻지마’살인에까지 치닫는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로서의 자신에 대해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이드로의 변신도 점차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만다. 지킬이 시도 때도 없이 하이드로 변신하는 것이다.

지킬은 더 많은 약이 필요했지만, 새로 약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계속 실패한다. 애초에 그 약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시피가 아니라 재료에 섞여 있던 불순물이 약을 탄생시켰다.

드디어 지킬은 마지막 약을 먹는다. 지킬의 상태로 하이드의 비밀을 밝히는 고백서를 쓴 뒤 독을 마시고 하이드를 끝장낼 결심을 한다. 경찰은 지킬의 집에서 하이드로 다시 변해 죽은 그의 시신만 발견한다.

지킬은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도 그랬다. 그도 위험한 길을 걸었다. 니체는 ‘방랑자’(The wanderer)란 그의 시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더 이상 길도 없다. 주위엔 심연과 죽음 같은 정적뿐.
너는 그걸 원했다. 너의 의지는 길에서 벗어났다.
자, 방랑자여, 잘했다! 이제 차갑고 맑게 바라보라.
너는 길을 잃었으니 네가 의지할 것은 위험뿐이다.”

니체는 그의 망치로 절대적 규범을 깨부수고 싶었다. 선악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추구했다. 산에서 10년을 은둔하다 하산한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입을 통해 “신은 죽었다”고 말해도 봤다. 그는 방랑자를 자처하며 이상을 찾아 위험을 불사하는 초인의 삶을 염원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지킬박사는 니체처럼 선악을 넘어서기보단,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선악의 분리를 시도했다. 선악의 문제에 대한 둘의 접근방식은 달랐지만, 어느 경우든 절대 선인 하나님을 떠나 위험한 길을 걸었던 건 매한가지다. 어떻게 미화하든 그들 삶의 본질은 니체의 시 제목 그대로 단지 길 잃은 ‘방랑자’였을 뿐이다.

지킬 박사는 선과의 갈등없이 악을 즐기려 했지만, 선악은 본질적으로 전쟁의 관계다. 우리의 비극은 인간의 자아가 죄와 맞붙으면 필패한다는 것이다. 그 실례가 창세가 3장에 나와 있다.

에덴동산이 그 전쟁터였다. 사탄의 유혹에 걸려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무너졌다. 선악과가 무엇인가? 그건 결코 사탄의 유혹처럼 선악을 아는 신적 경지로 올라서는 것(창세기 3:5)이 아니다. 선악과의 결국은 선을 떠나 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니체도, 지킬박사도 그 유혹에 걸려들었다. 아담 이래 우리 인류 모두가 그렇게 그 길을 갔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였다. 완전한 의인이었던 그가 죄에 패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힘으론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죄가 일단 우리 안에 들어오면, 하이드가 지킬을 지배했듯 죄는 왕 노릇을 한다(로마서 5: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로마서 12:21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 말씀은 우리의 선한 양심으로 악과 싸워 이기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사도 바울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이 말씀의 본뜻은 앞의 19절이 해설해준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이긴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7 말씀이 그 약속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지킬은 약을 먹고 선과 악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일상 속의 우리는 약을 먹지도 않고 수시로 선악을 넘나든다. 그러고도 선한 지킬인 양 위선을 부린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킬보다 더 위험하다. 그렇게 죄인 된 우릴 위해 죽으신 예수가 사무치게 그리운 시간이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