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거리, 마음의 세계

지구촌. 과학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온 인류가 쉽게 왕래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사는 지구별이 마치 한 마을(촌, 村)과도 같아진다는 의미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내가 보낸 ‘카톡’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즉각 전달되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돌아보면 이런 것들이 가능해진 것이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구글 맵에 런던의 내가 사는 동네와 오클랜드 알바니 사이의 거리를 구해보니 11,373마일(18,000km 정도) 이 나온다. 이 현실감 없는 거리만큼 옮겨와 살고 있다니 새삼 뉴질랜드가 더욱 멀다가도, 아직도 너무 생생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것만 같다.

물리가 결정하는 거리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오클랜드에서 런던에 오는 방법은 많지만 직항은 없다는 것이다. 기술적 문제인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안전상의 문제 (Health & Safety) 인지 알 수는 없다.

참고로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남태평양까지 가는 직항 중 제일 최장노선은 호주 퍼스까지라고 하니, 시드니나 멜버른을 가려 해도 중간 어딘가에서 경유를 해야 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긴 직항 노선은 싱가포르와 뉴욕을 오가는 19시간인데, 얼마나 힘든지 비즈니스 클래스와 프리미엄 이코노미로만 운영되고 보통 이코노미석은 아예 없다고 한다.

처음 런던에 올 때 나는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침 동생이 휴가를 낼 수 있게 되어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며칠 같이 놀기로 한다. 사실 오클랜드에서 싱가포르는 그렇게 멀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0시간이나 걸리는 루트였다.

뉴질랜드에서 한국까지가 11시간 정도인데, 적도 근처에 자리한 위도상 훨씬 아래에 있는 싱가포르이니 한 6시간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서쪽으로 좀 더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과 적도 근처로 갈수록 지구가 뚱뚱하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더웠지만 즐거웠던 며칠을 뒤로하고, 나는 런던으로 왔고 동생은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그것이 남매 둘의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지금 동생은 결혼하고 엄마가 되었다)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싱가포르에서 런던까지는 13시간이 넘는 긴 비행이었다. 싱가포르 항공과 뉴질랜드 국적기인 에어 뉴질랜드가 코드셰어(공동운항)로 운행하고 있으니, 혹 에어 뉴질랜드 항공을 자주 이용한다면 추천. 싱가포르에서 먹는 칠리 크랩도 덩달아 추천하고 싶다.

두 번째로 내가 이용해본 경로는 에미레이트 항공을 타고 두바이와 멜버른을 거쳐 오클랜드로 들어가는 방법인데, 장점이 있다면 수하물을 가방 1개 기준 30kg까지 허용해 준다는 것이다. 런던에서 두바이까지는 7시간 정도가 걸리고, 두바이에서 멜번까지는 14시간 정도가 걸리는 긴 비행이다.

하지만 두 노선 다 에어버스의 A380으로(대형 항공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보잉의 747에 대항하기 위해 에어버스사에서 개발한 현존하는 여객기 중에 가장 큰 항공기) 운행을 하는 데다가, 에미레이트 항공의 넉넉한 자리 설계로 인해 그 어느 이코노미석보다-정말 승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여유로움을 느끼며 갈 수 있다. 앞 좌석 스크린 화면도 정말 넓고 아이패드 급으로 화질이 정말 좋은데, 거기에 영화까지 잔뜩 들어있어(한국 영화포함!)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돌아오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오클랜드에서 두바이까지 한 번에 이동해서(17시간 소요) 런던으로 오는 일정이었는데, 다른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어느 노선을 타더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시차 적응이다. 뉴질랜드와 영국은 말 그대로 낮과 밤이 바뀐 시간대를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잘 조절해야 편하다.

그래서 차라리 조금 비싸더라도 대한항공을 추천한다. 한국이 딱 중간에 있어서 11시간 정도의 비행을 2번 한다고 생각하면 쉬운데, 갈 때는 한국에서의 레이오버 시간이 2시간밖에 되지 않아 조금 빠듯한 느낌이 들 수는 있지만 냉면 한 그릇 먹을 시간 정도는 충분하고, 돌아올 때는 레이오버 시간이 16시간 정도로 길어서(한국에 저녁에 도착하면 비행기는 다음날 오후) 예약 시 영종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재워준다.

무엇보다, 몇 번 타고나니 마일리지가 많이 쌓여서 최근에는 모닝캄 회원으로 승격까지 받았다. 23kg 수하물 2개 무료는 물론이고 2년 동안 최대 4회까지 대한항공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나도 촌티를 내며 이번에 처음 이용해 보았는데, 먹을 것도 잔뜩 있는 데다 자리도 너무 편해서 이래저래 시간을 때우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백령도가 고향이신 우리 엄마는 어린 시절 고작 200km 남짓 되는 뱃길을 12시간씩 배를 타야 인천으로 간신히 나오실 수 있으셨다던데(지금은 4시간이면 가는 거리),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누리는 문명의 혜택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 아마도 우리 생애에 런던과 오클랜드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한 직항노선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이 결정하는 거리
하지만 제아무리 멀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울 수 있고, 바로 코앞에 있던 것들이 딴 세상일처럼 멀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그것은 마치 ‘타카푸나에 사는 운동을 싫어하는 당신’과 ‘타카푸나 비치’ 사이의 5분짜리 거리보다, 지금 ‘런던에 사는 나’와 ‘타카푸나 비치’ 사이의 거리가 오히려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랑기토토 섬 뒤로 떠오르는 해를 머금으며 해변을 따라 뛰고 싶은 나의 마음이 물리적 제한들을 넘어 우리의 지경을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넓혀 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자리가 어디이든 간에, 언젠가 다 연결되고 완성될 그 모습을 꿈꾸며 함께 가자. 런던에서도, 오클랜드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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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17살 때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 오클랜드 대학교 상대 졸업. 2016년에 런던으로 이주,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킹스크로스교회 출석. 지하철(Underground)처럼 보이지 않지만 서로 연결된 런던이란 도시의 이모저모와 느낀 점들을 늦깍이 이민 1.5세의 눈으로 사유하고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