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

모세가 하나님이 말씀한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던 모세가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을 형상화한 우상을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프타’를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섬겼다. 이 ‘프타’신을 송아지의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피스’였다. 이집트의 사제는 한 송아지를 선택해서 ‘아피스’로 정하고, 이 송아지를 프타신의 현현(theophany)으로 선포해 그에게 경배와 찬양을 돌렸다. 그러다 이 황소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 특별한 장소에 보관까지 했다. 훗날 아피스는 로마에서 다산의 신 ‘오시리스’로 불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을 모아 이집트의 창조의 신 ‘아피스’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그 앞에서 옷을 벗고 광란의 파티를 즐겼다. 그때는 출애굽 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출애굽 과정에서 10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고, 바위에서 터진 물을 마셨으며,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날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광야에서 사면을 바라보면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셨다. 이스라엘은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보고 느꼈다. 하나님은 그런 환경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을 만들게 했다. 눈을 떠서 잠들기까지 이스라엘은 그들을 돕고 지키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데 40일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들의 탐욕과 욕망을 그 앞에서 터트렸다.

금송아지의 정체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세월과 상관없이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모른다. 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내가 무엇을 감추고 사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고난의 계절,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동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가족들과 사람들 앞에서 감추고 있었던 나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게 된다. 고난 앞에서 드러난 그 추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나를 철저하게 감추고, 그 원인을 타인 때문이라고 정죄한다. 내 영혼은 더욱더 피폐해진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부재’란 낯선 상황에서 그동안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숨겨 두었던 욕망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 맘대로 사는 세상을 합법화했다.

아론은 눈뜬 거짓말처럼 금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했지만, 금송아지는 그들이 놀던 세상과 광야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절묘하게 결합한 장난감 상자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금송아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은 신비한 일이었지만, 430년 동안 익숙해져 있던 이집트의 오락과 문화를 단칼에 쳐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불렀지만, 그들은 다시 죄의 종 된 노예로 살기 원했다.

내 안의 금송아지
내 안에 자리 잡은 금송아지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드러내 놓지 않고 숨기고 있는 감춰진 욕망은 무엇일까?

내 안에 숨겨진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였다. 이것은 나를 움직이는 동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겸손한 척, 온유한 척, 사랑하는 척을 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열등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열등감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낮추어 보는 태도이다. 나에게는 타인과 같은 능력이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나 의식이다.

열등감은 소극적으로 자신 안으로 들어가 내향적인 성격을 만들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열등감은 떠버리거나, 허풍을 부리기도 하고, 자신을 과대포장 하게 만든다. 이런 성향은 드러나기 때문에 내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나처럼 인정받기 원하는 내재된 열등감은 충성과 성실, 헌신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과 폭풍우가 밀려오면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충성과 헌신은 금송아지처럼 세상에 드러난다. 고난은 내가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또한 고난은 내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지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던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은혜를 가져온다.

금송아지를 버려야 한다
태풍은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거센 바람을 동반하는 태풍은 바닷물을 순환시켜, 바닷속에 산소를 공급해 수중환경을 건강하게 하고, 지구 대기의 열의 균형을 맞춘다. 눈앞에 보이는 성난 파도는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위협적인지만, 태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태계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은 고난을 태풍처럼 사용하신다. 태풍을 통해서 부분적인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바람을 동반한 태풍은 오염된 바다와 대기를 정화한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불어오는 태풍과 같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내 안에 숨겨 놓은 금송아지를 드러나게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한다.

내 안의 금송아지를 마주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버려져야 하기 때문에 더럽고, 남들에게 드러나기 때문에 수치스럽다. 그러나 내 안의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발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금송아지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강한 바람에 큰 파도가 휘몰아치지만 피하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만큼 내 안에 더러운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어디로 가고 하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팻말이 바람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