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학교 커리큘럼

0
3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번영신학이 축복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영신학의 또 다른 잘못된 가르침은 ‘고난’에 대한 관념이다.

고난을 축복의 반대편 혹은 축복을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렀고, 당신의 말씀과 마음을 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 앞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잊었지만, 고난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했다.

고난은 축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고난 그 자체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광야학교 커리큘럼
얼마 전 어려운 일이 있었다. 하나님에게 따져 물었다. 제가 주님을 따라나선 지 햇수로 얼만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제가 편한 꼴을 보기 싫어하십니까?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울며 애통해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화가 났다.

한참을 그렇게 불평해도 아무 말씀도 없기에 이번에는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셨다. “네가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기 때문이니? 주의 구원이 더디 이루어져 낙담한 것이니?”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뿔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교할 때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고 말은 하는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낙담하기보다는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할 때가 더 많다.

이런 나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광야학교의 커리큘럼을 사용하신다.

내가 경험한 광야학교의 커리큘럼은 단순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겐 가르쳐야 할 교과 과목의 목표가 정해져 있다.

영, 유아들이라 할지라도 놀이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교안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도 광야학교를 입학한 학생들을 위해 커리큘럼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광야학교에서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가르친다.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42차례 텐트를 펴고 접었다. 그들이 살던 라암셋을 떠나 2개월 동안 10번 이동했다. 2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해 그곳에서 1년 동안 머무는 장기체류가 시작된다.

그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성막에 대한 계시를 받고, 성막이 이스라엘 행군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의 내용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이후 이스라엘은 전쟁을 포함한 6가지의 사건을 경험한다. 그런데 각 사건의 내용은 길어야 2장을 넘기지 않는다. 나머지는 전부 율법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에 대한 소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시내산의 계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시내산 계시 이전에는 광야에서의 생존에 필요한 물과 식량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하나님이 계시한 계명을 따라 사는 법을 광야에서 배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순종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십계명과 제사와 절기,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배웠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키워드는 순종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요구하셨던 순종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다.

광야학교의 커리큘럼의 하이라이트는 순종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순종’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지킬 때도, 가장 어려운 것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몇 해 전 딸아이가 결혼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결혼하겠다고 말한 배우자는 홍콩 남자였다. 자녀의 국제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퍼스까지 찾아가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리고 왜 그 청년이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속이 타 들어갔다. 모든 아버지에게 딸은 내가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설렘을 기억나게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딸아이의 남편이 될 사람은 최고의 남자이길 바란다. 그런데 딸 아이가 소개한 그 청년은 내가 기대했던 사위로서의 이상형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딸 아이가 사랑하는 그 청년과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축복해주는 것이었다.

반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축복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에게 이 딸이 어떤 존재인지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음 날 아침,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보셨다.“네 딸이 지금까지 이렇게 잘 성장하도록 네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니?”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를 주님께서 돌보고 계심을 내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결혼을 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네 딸이 얼마나 기도했는지 네가 아니?”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과 자리를 잊으면 교만해진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주고 받는 것만이 아니라 쓸데없는 상처들을 끌어 모아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훈련은 그들에게 다가온 현실과 상황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들의 기대치와 다른 고통스러운 현실이 다가올 때마다 흔들렸다.

광야의 고통은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광야는 내 안에서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고난이 유익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를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어려운 상황, 불투명한 미래, 아낙 자손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이는 메뚜기 같은 나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아니, 못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계명으로 약속하셨다.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손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 것이다(출애굽기20:6)”.

나를 내려놓는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과정에서 아파하는 나에게 힘내라는 주님의 사인이 딸아이가 보낸 카톡 메시지를 통해 전해졌다.

“아빠 고마워요! 언제나 격려해주고 지지해줘서… 아빠 때문에 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