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교성 목사<뉴질랜드기아대책 대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때에 제사장 한 사람이 그 길로 지나가다 그를 보고 피해 지나 갔고 한 레위인도 그를 피해서 지나갔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 길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행동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본질을 안다면 그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자신들을 개같이 취급했던 유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자기가 친히 치료했고, 나귀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지기의 돈을 지불하면서 그 사람을 부탁하고 떠났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아무 유익도 구하지 않고, 아무 조건도 없이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희생의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친히 대속제물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 십자가는 주님께서 짊어지신 고귀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것의 없다.

요한일서 4:7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힘도 지혜도 없다. 그래서 날마다 그 사랑을 간구하면서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강도 만나 자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천하려면 극복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말씀 안에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던 편견들의 파편들을 하나씩 뽑아내야만 한다.

정치적 갈등, 이념의 갈등, 종교의 갈등, 문화의 갈등, 지역의 갈등 등등.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드리지 못할 것들을 뽑아 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에서 소외되고 잊혀져 가는 많은 사람들을 가슴으로 품으며 그들과 더불어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의 딜레마
큰마음을 먹고 사랑을 실천해 보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그리고 사랑 실천의 현장으로 나아간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찾아간 곳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회의적인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굳이 이런 사람들을 도와야 하나? 이런 사람들을 도우니 더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 참으로 아깝다 등등 별의별 생각들이 들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도와주기에 더 망가진다는 것이고, 복지적으로는 망가졌기 때문에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악의 순환과 같이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계속 도와주고 도움을 받다 보면 그들에게서는 자립의 의지나 희망이라는 것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사회복지의 딜레마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런 원론적인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며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잠언 3:27-28에서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선을 베풀 힘이 있다면 마땅히 받을 자에게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받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되느냐’라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나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전폭적으로 우리를 지지해 주셨고, 선한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가 당연히 관심을 보이고 우리의 형편에 맞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을 때에 우리는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서 마음에 부담도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입버릇처럼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싶다고 한다. 주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주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주님의 눈물이 어디에 고이는지도 모르는체,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싶다고 노래를 한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물고,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이 머물고, 주님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면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은혜가 나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짧은 경험과 지극히 적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그 즉시 실천에 옮기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복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사랑으로 감싸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모든 일이 은혜 안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회복지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임을 명심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