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역사로 집 짓고…수상 만찬에도 초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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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정착한 지 2년이 지난 다음, 뉴질랜드의 돌아가는 내용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았다. 새롭게 개발되는 주거지역에 대지를 사고 은행융자를 얻어 주택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사한 다음 집들이(Warming home)를 할 때 뉴질랜드 친구들의 많은 축하를 받았었다. 집들이 하는 날, 뉴질랜드의 친구는 ‘열심히 살아가는 Korean Kiwi’라고 소개를 하여 모두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1년 만에 대지를 사고, 그리고 1년 만에 집을 짓게 된 것이다. 약 900m2 대지에 거실과 방 세 개와 간이차고(80m2)가 있는 건물을 짓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잔디를 깔고 화단을 만들게 되었다.

차고와 차고로 가는 길(Drive way)에는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콘크리트를 하지 않았으나 우리들이 직접 콘크리트를 하기 위해서 20톤의 자갈(Shingle)과 30포의 시멘트와 빌려온 수동식 믹서기를 갖다 놓았을 때 산더미 같이 느껴졌다. 콘크리트를 하는데 두 번의 주말이 걸렸으며 그야말로 개미의 역사였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위로했으며 주말(토요일과 일요일)의 고마움을 느꼈다. 젊었을 때라 월요일 출근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집 주위의 정리가 끝나고 난 다음 이웃집들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성탄절 휴가 때는 성탄절이 지난 다음, 2주 동안 기계의 정비나 특별청소를 한다. 휴가기간 중에 일하기를 원하는 직원들에게 먼저 일거리를 주었다.

3년 동안 휴가없이 계속 일을 할 수가 있어 매달 집 지을 때 빌려 쓴 은행 빚을 갚을 수가 있었다. 은행에서 빌려온 돈을 갚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서 아내가 금붙이를 팔려고 했다.

한국에서는 순금거래가 되었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순금거래가 금지된 나라이다. 금붙이를 사게 된 것은 한국에서 아내가 보세가공 스웨터의 꽃들을 수놓았는데 그것을 모아 금붙이를 사게 된 것이다.

목걸이와 반지를 합하여 7돈의 금을 당시 가격의 절반을 받고 친한 친구에게 팔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친구는 호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다시 신용 본위로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사게 되었다. 순금거래가 되는 한국에서는 현찰보다 나은 금붙이였지만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순금거래가 되지 않는 곳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용으로 순금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헤이스팅스의 Morrison Industries Ltd에서 4년을 근무하고 1978년부터 2년간 타우랑가에서 선식업(Oriental Ship Supplies Ltd)을 경영했다. 1980년에는 오클랜드에서 수출입 오퍼 상(United Oriental Trading Co)을 경영하면서 심심치 않게 잔돈을 만지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석유파동으로 불경기를 맞이하여 25kg짜리 쌀 한 자루를 차에 싣고 내가 살던 뉴질랜드의 고향인 헤이스팅스로 돌아올 때 와카타네(whakatane)에서 기스본(Gisborn)으로 가는 길의 한쪽에 맑은 개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내와 나는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리고 마음속 안정을 얻어 그곳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1981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으로 사업을 중단하고 다시 헤이스팅스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3년부터는 4년 동안 웰링턴 인접 도시인 포리르우아(Porirua)의 엘스던(Elsdon)에 있는 Cyclon Farm Product Co와 G.E.C에서 근무했다.

수상 만찬에 초대받아
국회의원인 친구가 우리들을 수상(Prime Minister)이 참여하는 만찬에 초대하였다. 정장 차림으로 참가를 해야 한다는 그 친구의 부탁으로 한국을 떠날 때 입었든 정장을 꺼내 입었는데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체중을 달아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7년 동안 유지해온 68kg의 선이 무너지고 61kg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30일 동안에 7kg이 빠진 것이다. 샌드위치 두 쪽으로 12시간의 중노동을 감당했으며, 오전과 오후 새참에는 우유를 탄 홍차만 마셨으니 체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수상의 만찬에는 마침 콜롬보 플랜으로 방학 중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서울 모 고등학교 교사도 함께 참여해도 좋다는 국회의원 친구의 배려로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수상의 행차가 너무나 단조로웠다. 경호 경찰 한 사람은 순찰 오토바이로 수상 차의 전방에 서고, 또 한 경찰은 수상이 탄 차의 후방에 따라와 건물 입구에 서 있었으며 초청받은 사람들이 모두 입장을 하자 경호 경찰도 실내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만찬을 수상과 함께 먹고 있었다. 만찬이 끝난 다음 수상이 지역 국회의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을 돌면서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수상의 테이블 인사가 끝나자 전체적인 공식 인사가 있은 다음 수상의 만찬은 끝나게 되었다.

몇 년 후의 일이다. 웰링턴에서 있었던 일을 신문에서 읽었다. 당시의 수상이 토요일 오후, 가족들과 함께 쿠바 몰에 있는 햄버거를 사러 갔으며 수상의 차는 노란 점선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교통부 직원(오래전에는 금침원이 교통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음)이 금침을 하러 수상이 탄 차에 다가와 미터가 종료되었음을 보고 벌금형을 붙이고 갔다.

그 신문 기사의 내용은 상황설명을 하고 난 다음 교통부 장관과 신문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나와 있었다. 그분은 뉴질랜드의 총리이므로 국고에서 벌금을 지급하느냐? 아니면 수상 개인이 지급하느냐?고 물었다.

교통부장관의 대답은 햄버거를 사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상 개인이 지급한다는 내용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이다. 잘잘못이 분명히 가려져야 하며 수상이라고 해도 법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수상이 항상 앞장서는 곳이 바로 이곳 뉴질랜드이다.

올바른 판단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그와는 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지상의 어느 나라이다. 민주주의는 인권이 통일된 곳이 발전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웰링턴에 자주 내왕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뉴질랜드 국회에 못 와본 국회의원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정작 배워 갈 것은 배우지 않고 그냥 돌아간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국회의원이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면 무엇을 배워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