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과업(Unfinished Business)

이달견목사<빅토리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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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Form 을 새롭게 하는 것. 개신교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단어다.

개혁교회에서 자주 회자되는 문장이 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틴어,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영어, the church must always be reformed) 오늘 우리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고인 물은 썩는다. 개혁을 멈춘 교회는 전통에 매여 생명력을 갉아 먹힌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 형님들의 물음을 보라.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마가복음7: 5)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줄로 알고 있는 형님들의 영적 무지를 보라.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마가복음7: 8,9)

그들은 전통과 계명이 상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전통에 함몰되어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무능을 볼 수 없었다. 영적 맹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맹인의 차원을 넘어 감각을 잃은 영적 나환자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로 유대인 형님들에 대한 쓴 소리는 그만 두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우리는 전통을 따르고 있나? 계명을 따르고 있나?

성경의 회복-1차 종교개혁
우리가 알다시피 1517년 10월 31일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95개 논제를 붙임으로써 개혁의 불씨가 지펴졌다.

깔뱅과 쯔빙글리 그리고 멜랑히톤 등의 헌신과 순교적 각오로 그 개혁의 과업은 완성되었다. 카톨릭 전체가 회개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세교회의 타락한 영성을 배제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 이후 500년… 또 하나의 개혁을 꿈꾼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의의는 성경을 성도들의 손에 가져다 준 것이다. 들어도 알 수 없던 성경이 이제는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바뀐 것이다. 이건 혁명적인 일이었다.

전통은 성경의 번역을 좌시하지 않는다. 거룩성의 훼손을 염려한 거다. 사제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계명은 말씀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격려한다. 결국 계명의 승리로 전통을 극복하고 성경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을 통해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육성(Ipsissima Vox), 성령의 감동(inspiration)하심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찬란하고도 위대한 개혁의 결과이다.

오늘날 그 개혁의 열매로 전세계에 교회가 세워졌다.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Encounter). 지면을 빌어 16세기, 개혁에 목숨을 걸었던 훌륭한 선배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사역의 회복-2차 종교개혁
그렇다면 오늘 개혁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과업은 무엇일까? ‘사역을 성도들의 손에 들려 주는 것’이다. Greg Ogden 이라는 미국 목사님은 “Unfinished Business”라는 책을 통해 그것이 두 번째의 종교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경을 사제들의 손에서 성도들의 손으로 옮겨 준 일이라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사역(Ministry)을 목회자들의 손에서 성도들의 손으로 옮겨 주는 일이다.

사역을 성도들의 손으로 옮겨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20세기 들어서 여러교회들이 외쳤던 구호다.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화 사역” “성도들을 사역자로 세우는 교회”등등의 슬로건도 많았다.

그런데 정말 성도들에게 사역이 넘어갔는가?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문해 본다.

‘미생’의 상태에 성도들을 두고 있지 않은가? 신의 한수로 살릴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일 수도 있는 바둑알처럼 성도들을 중간지대에 두고만 있지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실미도’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훈련은 받되 실전에 투입되지 않아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군인들처럼 말이다.

목사는 모든 은사를 다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이민목회는 팔방미인 같은 목사를 원한다. 그러니 탈도 많고 말도 많다. 목사는 목사의 역할을 하면 된다.

21세기에 들어서 ‘목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슈가 많이 제기되었다. 많은 연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목사는 ‘성도들을 준비(equip)시켜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Equippers church 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성도들을 준비시켜 주는 교회다. 준비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사역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사역하는 성도
목사는 유모, 코치 혹은 훈련가다. 우리는 2002년의 해를 잊지 못한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해다. 그 결과와 함께 우리의 뇌리에는 ‘히딩크’라는 존재가 남아 있다.

그는 탁월한 훈련가며 코치였다. 선수들의 기량과 특기를 따라 그들을 가장 알맞은 포지션에 두고 축구라는 장기를 둔 사람이다. 철저하게 훈련시킬 뿐 아니라 실전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여 집을 지었다. 한 선수도 미생의 상태에 있지 않게 했다.

‘내 아이의 미래력’(정학경 저)이라는 책에서는 듣기만 하는 사람은 5%만 기억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통해 배운 사람은 20% 기억하고, 시범이나 현장 견학은 30%, 그룹 토론은 50%, 직접 체험은 75%, 친구 가르치기는 무려 90%를 기억한다고 한다.

우리 교회 안의 성도들은 대부분 50% 이하의 기억만 가지고 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90%이다.

유대인들의 창의력은 ‘하브루타’라는 교육방식에서 기인한다. 수동적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를 통해 수업은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는 시간이 된다.

내 딸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 내 친구 OO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꼭 나한테 ~~에 대해서 말해 줄까? 이렇게 물었어! 나한테 말해주면서 자신은 스스로 정리했나 봐”

그 친구는 수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르치는 학생이 최고의 기억력을 가진 학생이 되고, 전투하는 군인이 최고의 용감한 군인이 되듯 사역하는 성도가 최고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주변에 사역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들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고의 수혜자는 사역하는 성도들 자신이다.

목회의 가장 큰 보람은 성도들의 변화다. 그 변화의 촉매제는 사역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시행착오도 있고 여러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장은 담아야 한다. 상 위에 놓여진 음식들이 제 맛을 내려면 장은 꼭 필요하다. 16세기의 미완의 과업, 이제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