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운동과 1920년대 회유 정책(1919~1930)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로 인하여 선교사들에게 한국 문제에 개입하거나 일제와 대립하지 않는 것이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그들이 이 땅에 있는 이유가 선교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와 거리를 두는데 동의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의 경우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일제의 부당함에 분개하였고, 병탄 이후에도 일제와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정서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1911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된 이른바 105인 사건 때에는 미국의 북 장로교 해외선교부, 남 감리교 해외선교부 등 교단 별 해외선교부 총무들이 협의하여 일제에 압력을 가하고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하며 영국을 비롯하여 선교사들의 자국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는 등 압력을 행사한 기록이 있다.
특별히 1919년 삼일운동이 발발한 이후에 조선 민중의 평화적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비인도적인 만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그 참상을 고국에 알리는 한편 일제 당국에 직접 항의하는 등 일제에 반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191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다. 당초에 선교사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기를 원했지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전국의 교회가 만세운동이 중심이 되면서 선교사들은 조선독립을 주장하고 만세운동을 펼쳐나가는 교회 성도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를 비인간적으로 탄압하는 일제에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무단통치로 표현되는 일제의 1910년대의 통치는 삼일운동을 계기로 이른바 문화통치로 크게 변화한다. 표면적으로는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족언론의 창간을 허락하는 등 유화정책을 펼친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1915년 정식과목에서 제외하였던 성경 과목을 허용하는 등 사립학교들의 종교교육에 자유를 부여하여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 운영해왔던 많은 선교사들을 회유하였다.
일제의 병탄과 함께 도입된 신사참배가 1920년대에 선교사들이 설립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에도 요구되었으나 일제가 강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이지만 실제로는 조선 민중의 반일 독립의지를 희석시키고 한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정책이었다.
30~40년대 전쟁과 억압(1931~1945)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하면서 일제는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달려들어갔다.
일제는 버거운 전쟁을 하면서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강력한 파시즘 정권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통치도 전쟁물자와, 병력, 인력을 수탈하는데 용이하도록 순치시키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선교사들 가운데 신사참배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교를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 일제의 총독부 교육정책에 따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신사참배는 일본 천황의 조상신에게 참배하는 것이다.
일제의 교육당국은 그것을 종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국민의례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학생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상 다른 신에게 예배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고 하여 기독교계 학교에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가면서 전시체제로 들어간 군국주의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제로 이행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계기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하여 이를 일제의 식민지 교육체제에 완전히 편입시키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하자는 주장도 있었고 학교가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1936년에 숭실학교 교장 매큔과 숭의여학교 교장대리 스눅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고 학생들에게도 시킬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서면 답변한 후 교장 직에서 파면되었다. 이 일을 두고 북 장로회 선교부는 소속학교 폐교 여부를 제기했고, 선교사 연회에서 이른바 ‘교육철수’를 의결하였다.
곧 선교회가 세속교육으로부터 철수하기로 하고 학교를 폐교하기로 하자, 선교사들 내부에서도 학교 유지와 폐교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생겼다. 1937년에는 남 장로교회 소속 10개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스스로 폐교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학교의 폐교까지 결정할 만큼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읽혀지기를 바랐지만, 일제는 선교사들의 기독교계 학교까지 식민지교육에 편입하고자 하는 의도를 관철시키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선교활동을 유지하고 학교를 지속하기 위하여 일제와의 대립을 피하고 협조하였던 선교사들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미. 일, 미. 영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선교사들은 적성국민으로 취급되고, 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래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아시아에서도 전쟁 확산이 예상되자 미국 국무성은 미국인의 철수를 권고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에서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사의 철수를 권고하였고, 1940년 11월 116명의 선교사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11일 일제의 진주만 기습 이후에는 그때까지 버티던 선교사들은 구속되고 억류되었다가, 나중에 연합국에 억류되어 있던 일본인들과 교환하기 위하여 강제로 송환되었다.
스스로 철수했거나 강제로 송환된 선교사들과 선교사들 자제 중에서 해방 이후 미군정에 참여한 인물이 있다. 통역관으로 또는 행정관으로 활약한 이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미군정 끝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나름으로 기여하였다.
글을 맺으며
크리스천라이프가 이스라엘의 건국 70주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70주년이 되는 올해 2018년도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과 대한민국 두 나라가 회복하는 70주년으로 설정하고 기획하여 필자에게 원고를 맡겼다.
그 동안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유대교도인 유대인, 이방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의 역사들을 살펴보았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세계에 흩어져 핍박 받던 많은 유대인들의 안전한 정착의 소망을 이룬 반면, 잠깐 피난한다고 가서 지금껏 고향을 빼앗기고 돌아갈 수 없이 봉쇄된 땅에 갇혀 사는 가자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헌국회에서 기도로 시작한 우리나라 대한민국 또한, 엉겁결에 그은 38도선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국경선이 되어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암담하였다. 다행히 올해 들어 남북관계는 이제까지 70년 동안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장면을 연출하고 있으니,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나 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때 이러이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이미 돌아갈 수 없다. 아쉬움이 있다면 지금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진정 회복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