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의 지역에 복음의 소식 알릴 때가 바로 이때다

1775년 4월 19일부터 7년간 치뤄진 미국과의 전쟁에 패한 영국은 그때부터 남태평양에 눈을 돌리게 됐다. 먼저 호주를 발견한 그들은 자국의 수용능력에 한계를 느낀 범죄자를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때 성공회 소속 윌리엄 윌버포스가 채플린도 같이 보내라고 하여 사무엘 마스튼목사가 처음 호주에 오게 됐다.

영국에서 호주 시드니에 온 사무엘 마스튼
그 당시 캠브리지 대학에서 윌리엄 윌버포스의 영향으로 선교를 결심한 사무엘은 보조 채플린으로 1794년에 부인과 함께 호주 시드니 Port Jackson에 첫발을 내딛고 파라마타에 집과 1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조성해 선교를 시작했다.

범죄자들을 일꾼으로 써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지만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Magistrate(뉴질랜드의 JP와 비슷)로 활동 하면서 1807년 경에는 농장을 3,000 에이커까지 확장을 했다.

1800년에 다른 채플린이 영국으로 돌아가고 사무엘이 NSW주 시니어 앵그리칸 미니스터가 되자 원주민인 애보리진 선교에 몇 번이나 시도를 해보았다.

하지만 원주민 대량학살에 따른 유혈사태와 대영제국의 이익을 대변하던 대다수의 영국계 백인 선교사들로 인해 같은 가해자로 분류되는 백인으로서 호주 원주민 선교에는 실패하게 됐다.

뉴질랜드보다 먼저 시작된 호주의 선교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19세기 중반까지는 별로 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영국 선교사들은 인디아로 갔고 교육 정도가 낮은 선교사들이 남태평양으로, 맨 마지막이 NSW주로 갔다. 그래서 NSW주 총독들은 낮은 신분출신이 많은 비성공회계 선교사들을 의심스러워 했고, 목적상의 갈등도 있었다.

무엇보다 교회가 손도 써보기 전에 불신자 백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페터슨소령은 파라마타에서부터 혹스베리 강 사이의 교수대에서 죽은 원주민 머리들을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원주민 대상의 첫 공식선교사인 윌리엄 워커가 1821년 토마스 코크 베네롱이란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사람들은 원주민들을 함의 자손으로 이해하고 저주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시드니에 온 마오리 루아타라추장과의 만남
사무엘은 마오리 루아타라추장이 1814년 뉴질랜드에 초대하기까지 뉴질랜드 선교를 준비하게 되는데 그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에는 유럽에서 온 고래잡이 어부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마침 뉴질랜드에서 온 고래잡이 어부들과 함께 1805년 호주에 온 마오리 Te Pahi (최초로 호주를 방문해서 사무엘을 만난 마오리추장)와 마오리 5명을 자기집에 재우고, 먹이고, 새로운 문화를 가르치면서 사무엘 자신은 마오리 문화를 배우면서 뉴질랜드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1807년 다시 영국에 가서 CMS(크리스천처치 미셔너리 소사이어티)에 정식으로 뉴질랜드 선교를 건의하고 동의가 나자 1809년 윌리엄 홀, 존 킹목사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호주 자신의 집으로 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 때 사무엘은 배 안에서 1805년 시드니에서 만났던 루아타라추장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루아타라는 일찍부터 바깥문명에 관심이 많아서 고래잡이 배를 타고 호주를 들렸고 이번에는 영국까지 진출했었다.

영국에 가면서 그는 자신이 추장이라 영국에 가면 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배에 올랐지만 배에서 그에게 돌아오는 대접은 동물 취급을 하는 모멸감 뿐이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얻어맞아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호주로 돌아오는 앤 이라는 배 안에서 사무엘을 다시 만났다. 항해 중 사무엘은 루아타라 추장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마오리 말을 배우게 됐다.

뉴질랜드의 선교를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해
루아타라추장 구타 사건 후 보이드란 배를 타고 팡가로아에 도착한 백인 70명은 마오리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뉴질랜드 선교는 잠시 연기됐다.

그러나 사무엘은 1810년에 그 당시 자신의 집에 기거하며 농장에서 일을 배우고 있던 루아타라와 다른 마오리들을 준비 시켜서 먼저 뉴질랜드로 보낸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이드 사건 이후 아무도 자기 목숨을 담보로 뉴질랜드에 들어갈 백인 선장은 없었다.

따로 Active란 배를 구입해서 이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1814년 사무엘은 윌리엄 홀, 토마스 캔들과 함께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이들은 루아타라 추장의 영접으로 대접을 잘 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홍이헤카, 코로코로 등 수명의 마오리 그룹들은 시드니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이들은 서로 보호하는 관계가 됐다.

사무엘은 이미 지난 방문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완벽한 준비를 한 후 NSW 주 총독 Lachlan Macquarie에게 채플린 자리를 4개월 비울 수 있는 허가를 받고 1814년 11월 28일 시드니 Cobe에서 뉴질랜드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 배에는 마오리 8명과 선교사 3명(1차 때와 동일인들)과 가족들 그리고 기술자들 (벌목공 2명, 쇠 작업공 1명, 광부 2명)과 동물들(말, 송아지 1, 황소 2, 양, 염소, 닭 등)이 타고 있었다.

항해 중 배 멀미가 난 사무엘로 인해서 몇 군데를 들렸다 오느라 12월 22일에야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루아타라추장의 고향쪽 Rangihoua에 닻을 내렸다.

사무엘 마스든선교사로 하여금 “죄와 영적 속박에 갇힌 흑암의 지역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릴 때가 바로 이때다.”란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뉴질랜드 선교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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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