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이후 이곳에선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1948년 5월 15일~1949년 4월)은 이른바 ‘독립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 등 그 땅을 둘러싸고 있는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 이스라엘 국가의 실체가 확인되었다(지도 왼쪽에서 두 번째).

제2차 중동전쟁(1956년 10월 29일~1956년 11월 3일)은 이른바 ‘시나이 전쟁’이다. 이집트에서 낫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친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한 후 아랍연맹을 강화하면서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운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하여 아랍연맹을 견제하고자 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한 전쟁으로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이 있다. 이집트는 전쟁에서는 참패하였으나 수에즈 운하 국유화의 공인 등 정치적으로 완승하여 나세르의 입지가 강해지고 오히려 아랍연맹이 강화되는 결과가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1967년 6월 5일~10일)은 이른바 ‘6일 전쟁’이다. 아랍연맹을 강화해나가고 있던 나세르의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선제타격으로 단기간에 대승을 이룬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관할하던 가자(Gaza) 지구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고, 요르단이 관할하던 동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이하 서안 West Bank)을 점령하였으며, 시리아가 관할하던 골란(Golan) 고원을 점령하였다(지도 왼쪽에서 세 번째).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 6일~10월 25일)은 이른바 ‘욤키푸르(대속죄일)전쟁’이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사다트가 제3차 중동전쟁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과 벌인 전쟁이다. 전쟁 초반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전이 두드러졌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면서 반전을 이루었다. 이후 오랜 협정 끝에 1978년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완전히 반환하였다(지도 맨 오른쪽).

두 개의 국가
19세기말 테오도어 헤르츨이 시온주의를 기치로 내걸며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이주하기 시작한 유대인들과 2000년 가까이 합법적으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 사이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전후 평화를 위한 유엔체제로 들어간 후 19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에 2개의 국가(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는 유엔 결의안 181호를 가결했다. 유대인은 찬성하였으나 아랍인은 자신들의 땅을 유엔이 분할할 권리가 없다 하여 거부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하고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고 독립전쟁(제1차 중동전쟁)의 승리로 그 입지를 단단히 하였다. 반면에 1차 중동전쟁 당시 거주지에서 잃고 떠난 70만의 아랍인들은 주변 아랍국가들로 피난하여 난민으로 살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아랍인 난민의 귀환을 봉쇄하고 그들의 경작지와 주거지를 점령하여 유대인의 정착지로 삼았고,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 고원, 서안, 예루살렘에도 유대인 정착촌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면서 땅을 잃게 된 아랍인들의 저항이 계속되어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1959년 야세르 아라파트는‘파타(정복)’이라는 이름의 군사적 해방운동을 시작했다. 1967년‘6일 전쟁’에서 패한 후 아랍연맹은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표로 인정하였고, 아라파트는 196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접수한 이후 민간인 살해, 비행기 납치 등 극단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8년 아라파트는 정책을 바꾸어 ‘2국가 해법’을 받아들이고(이스라엘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의미), 알 쿠드스(예루살렘의 아랍식 이름)를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계획하였다.

이스라엘과 PLO는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승인하기로 합의하였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201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투표권 없는 업저버 회원).

그러나 1987년 창설된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하마스는 서안을 근거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달리, 여전히 ‘2개 국가’를 거부(이스라엘 불인정)하며 가자 지구를 장악한 채 극단적 저항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주인들
1947년 유엔의 결의안 181호에는 예루살렘을‘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땅’으로 지정하고 국제관리지구로 삼았다. 그러나 ‘독립전쟁(제1차 중동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서쪽을 점령하여 동서로 양분이 되었다.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하였는데, ‘6일 전쟁’의 영웅 다얀은 예루살렘 성전 터에 세워진 황금 사원을 폭파하자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그대로 보존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아랍인들이 그들의 사원을 유지하게 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올해 5월 14일 미국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이에 저항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평화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은 어떻게 증오와 갈등을 이기고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예루살렘은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되고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이래 약 1000년간 유대교의 성지였으나, 2차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으로 AD 135년 이후에는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폐허가 되었다. 그 대신 예루살렘은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638년 이슬람제국에게 점령될 때까지 기독교의 성지였다.

이슬람 제국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은 무함마드의 승천 장소로서 이슬람의 성지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1098년부터 1244년까지 약 150년간 예루살렘 왕국으로 기독교의 성지가 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이슬람의 성지로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지금도 솔로몬 성전의 기초인 통곡의 벽이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고 있고, 황금사원(바위 돔)은 이슬람의 성지이며, 비아 돌로로사를 비롯하여 성묘교회 등 많은 기독교 성지들이 있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도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지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1945년 유엔이 설립된 이래 국제법으로는 전쟁으로 정복한 땅은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엔의 공식입장으로는 예루살렘이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땅’이다. 예루살렘은 지배세력이 누구든 상관없이 여전히 세 종교의 성지였고, 천년 이상 오랜 세월을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