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맬 때에 따라 갈 수 있는 길잡이, 성경

카페에 가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주변에 한사람 한사람 모여들곤 합니다.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딱 들면 100이면 100! 4살~5살 꼬마 아가씨들 입니다.

“what are you doing?” 하고는 저를 가만 쳐다봅니다. “그림 그려~, 너는 이름이 뭐니?” 하면 자기 소개를 합니다.

“My name is Gemma” “How old are you?”
“I’m turning 5 next month!”

조금 활달한 친구들은 수줍은 옆 친구 소개도 대신 합니다.

“She is Bella, she is 4!”

결국 둘 다 4살이라는 건데, 곧 turning 5한다는 Gemma는 더 당당한 얼굴입니다. 자기 소개는 그들만의 자기 소개로 충분합니다.

그림 그리던 언니의 이름보단 언니의 그림과 색연필이 더 궁금한가 봅니다. 활달한 친구도 수줍은 친구도 처음 보는 이름모를 언니 옆에 앉아, 같이 그림 그리기 시작합니다. 네-다섯살 꼬마 아가씨들이 그리는 그림은 100이면 100! 공주 그림. 그리곤 그림 아래에 자기 소개를 씁니다.

My name is Gemma. I am turning 5.
My name is Bella. I am 4.

저는 Gemma 와 Bella의 나이 쯤,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맞벌이를 하셔서 사회 생활을 남들보다 한 살 빨리 시작했죠. 초등학교 일 년도 모자라 어린이집도 일 년 빨리.

그렇게 한살 많은 언니, 오빠들과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은 빨간 모자 쓰고 어린이집에 가던 기억, 싸우다 선생님에게 혼난 기억, 혼나도 절대 울지 않던 기억, 달리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기어코 언니, 오빠들을 따라잡던 기억, 그리고 항상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야 안 사실은 키가 제일 작아서 선생님이 제일 앞자리에 앉혀두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제일 작아도 강하던 네 살 지연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심장이 쿵 하고’ (=심쿵) 무너진 사건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린이 집 미술시간에 “선생님을 따라 그림 그리세요” 하시더니, 선생님이 칠판에 무늬 하나를 그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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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따라 그림을 그렸죠. 가장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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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으로 끝내곤 옆 언니, 오빠들의 그림을 당당한 얼굴로 둘러봅니다. 그러던 와중, 옆 언니의 무늬와 제 무늬가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만 보니 선생님의 무늬와 제 무늬도 다릅니다.

다시 그려보고, 지우개로 지우고 또 다시 그려봐도, 저 칠판의 무늬와 제 무늬는 다릅니다. 조금 더 작게 아무도 안보이는 곳에 다시 그리다가, “어?……..나만 다르다, 그리고 나는 저걸 못 한다” 라고 깨달게 되었습니다.

옆에 앉은 언니도 제 그림을 가만 보더니 “응? 틀렸다” 합니다. 한참 뒤에 선생님이 아무말 없이 그림을 보시더니, 그 옆에 점선을 그려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려주신 점선을 따라 그릴 때야 같은 무늬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잘 했어” 하신 후, 그제서야 옆에 언니를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점선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요. 제가 그 날에 느낀 그 감정을 조금 어려운 말로 수치심이라고 부르더군요.

유아 발달 과정 중, 방향 감각 정립되는 시기가 4~5세 후 라는 사실을 스무살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점선을 따라 글을 배우게 하는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알지만, 네 살때 느낀 심쿵은 스무살이 넘어서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네살 꼬마 지연이가 느낀 “나는 다르고 나는 틀렸고 나는 못한다”의 감정을 Gemma 와 Bella는 조금 더 늦게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 so you are 4 AND you are 5? “Well done”하고 웃어줍니다.

조금 더딜수 있지만, 그 아이들도 4와 5를 잘 쓰는 날이 오겠죠. 카페에 가만 앉아있다 보면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납니다. 다 완벽할 것 같은 그 사람들과 한 두마디 나누다 보면 다들 조금 더딘 부분이 있고, 조금 부족한 부분들이 느껴집니다.

올해 25살이 되는 저는 여전히 더디고, 가끔은 방향 감각 없이 헤메고 그런 제 모습에 자주 당황하기도 합니다. ‘다들 잘하고 있는것 같은데 , 왜 나는 다르고 나만 못하는 거 같지?’ 라고 심쿵 할 때도 있죠.

그래도 웃어넘 길 수 있는 건, 유치원의 선생님이 아무 말없이 그려주신 점선 처럼, 헤멜 때에 따라 갈 수 있는 성경이라는 길잡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우리 주변에 더디고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주고 웃으면서 이끌어주세요! 

그 날의 제 유치원 선생님처럼 저에게 그러하셨던 것 처럼, 우리 하늘의 큰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