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 운동선수들 중에는 흑인 선수들이 많이 있다. 프로농구 선수의 80퍼센트, 미식 축구 선수의 70퍼센트, 프로야구 선수의 17퍼센트가 흑인들이다.
그러나 5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프로 운동선수 중에 흑인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두꺼운 인종 차별의 벽이 무너지게 된 데는 한 사람의 거룩한 희생과 꺼질 줄 모르는 조용한 용기가 있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다.
1974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책임자였던 브랜치 리키는 자신이 눈여겨본 탁월한 재능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게 거룩한 실험(noble experiment)을 제안했다. 그것은 프로 야구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깨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성깔도 있고 힘도 센 사람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버스 뒷칸에 앉으라는 것을 거부하다가 영창에 간 일도 있었다.
그런 그를 앉혀 놓고 리키는“예수 그리스도의 생애(The Life of Christ)”란 책을 읽어 주며(로빈슨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이렇게 다짐시켰다.“이제 자네가 그라운드로 나가면 군중이 매 게임마다 갖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을 것이고, 물건들을 집어 던질지도 모르며, 증오에 찬 고함과 눈길을 던질지도 모르네. 그러나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네는 절대 감정적인 보복적 반응을 해서는 안 된다네. 알겠나?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위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라, 차별 받는 흑인들 전체의 명예를 걸고 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젊은 혈기의 로빈슨은 기도하면서 이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운명의 날, 1947년 4월15일부터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1루수로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일은 쉽지 않았다. 로빈슨은 팬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욕설과 야유와 죽이겠다는 협박이 담긴 편지들을 받았고, 심지어는 몇몇 동료들조차도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흘겨 보았다.
그가 실수라도 한 번 범하면 군중들은 당장 죽일 듯이 야유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후에 기록하기를“로빈슨은 구장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모욕과 고통과 따돌림을 당하고도 저렇게 의연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로빈슨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은 10년 동안 다저스 팀에서 뛰었는데, 그가 뛰는 10년 동안 다저스 팀은 6번이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47년에 그는 내셔널리그 최고 신인상을 받았고. 1949년도에는 MVP로 선정되었다.
6번의 올스타 게임을 뛰는 찬란한 기록을 남겼던 그는, 1962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의 거룩한 희생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흑인 선수들이 미국 스포츠 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리더십이란 이렇게 매 순간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이겨내는 용기의 실천이다. 우린 다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하여 5분을 더 참으면 그것이 바로 용기이다.
전설적인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 그는 폭넓은 시각과 탁월한 비전과 창조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능력에 도취되어 자신의 비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많은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델 T외엔 그 어떤 새로운 모델의 자동차도 제작하지 않았다.
모델 T에 철저하게 취해 있던 그는, 어느 날 회사 디자이너들이 자기 모르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보여주자, 직접 망치를 들고 달려들어 차를 때려 부쉈을 정도다. 1927년까지 근 20년 동안 포드는 한 종류의 디자인만 고수했다.
포드는 결코 남을 세워주는 리더(empowering leader)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다 통제하려 했고,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자신의 기존 사고 방식과 다른 것을 내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는 지도자감이 보이면 가차없이 짓밟아 버렸다.
그의 아들 에젤도 아버지의 압제에 눌려 많이 괴로워하다가 1943년에 세상을 떠났고, 2대 회장에 취임한 그의 손자 포드 2세 또한 할아버지를 닮아 다음 세대 지도자들을 키우기는커녕, 탁월한 사장들을 서로 이간질 시키기까지 했다.
텍스 쏜톤, 어니 브리치, 루이스 크루소 등의 탁월한 사장들을 서로 이간질시켜 갈라지게 하여 차례로 회사에서 제거해버렸다. 그리하여, 리 아이아코카 같은 사람도 이 정치게임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헨리 포드는 항상 이런 철학을 고수했다. “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절대 편하게 두지 말라. 그들의 방식에 안주하게 놔두지 말라. 전혀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을 찔러서 괴롭혀라. 항상 그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고 조심하게 하라.”
탁월한 발명가였고 비전 메이커였지만, 포드 회사를 자기 개인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사라지고 난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드는 결국 GM에게 추월당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차, 독일차, 스웨덴차에게 밀리고 말았다.
리더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일은 자기가 없으면 그 단체가 무너질 정도로 그 단체를 자기에게만 의존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다.
오래 전 한국에서 전임전도사로 청년 사역을 하던 때에 서울 목동의 한 교회에 청년부 전임으로 부임하여 사역한 적이 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한 전도사가 청년부를 맡아 사역을 하였고, 그의 탁월함이 여러 사람들을 통해 내게 들려오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탁월한 전도사가 떠났고 새로 부임한 사역자인 내가 아무리 해도 리더십이 통하지 않는 거였다. 심지어는 청년들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도 교회를 떠난 탁월한 전도사에게 연락을 하는 등 보이는 것은 내가 전임사역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기도하고 그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그러면 되겠냐? 당신은 이미 떠난 분 아니냐? 그런데, 청년들이 전화오면 잘 가르쳐서 새로운 사역자에게 연결 될 수 있도록 하여야 내가 청년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일로 나는 러더십을 배울 수 있었다.
나 또한 지금 한 교회에서 12년째 담임목회자로 사역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주님이 인도하시면 사역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떠나야 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 나는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문제이며 숙제 일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떠한 리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