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과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부정적인 영향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면서, 국가 차원에서 법을 재정비거나 캠페인을 주도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학교 캠퍼스나 수업 중에 스마트폰을 금지하거나, 어린 자녀들의 온라인 이용을 제한하는 등 정부가 앞장서서 안전한 디지털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물론 정부와 교육기관이 마련한 제도를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 결과를 체감하는 개인과 공동체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음 세대가 겪고 있는 자살, 우울증, 불안, 약물 중독 등은 잘못된 온라인 사용과 스마트폰 남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저서 ‘불안세대’에서 다양한 연구와 통계를 통해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물론,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그 한 가지에만 돌릴 수는 없지만, 스마트폰 남용이 정신 건강과 특히 다음세대에 전반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부나 교육기관의 규제 노력과 더불어,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또는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다음 세대를 회복하기 위한 방향 중 하나로 ‘건강한 공동 체’를 세우는 일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가정, 소그룹, 교회 등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지닌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큽니다.
서로를 깊이 알고 돌보며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건강한 공동체는 단순한 만남을 넘어, 진정한 회복과 자유, 그리고 삶의 힘을 얻는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와 같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의 옳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인내와 헌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교회는 그 기본이 희생과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공동체로 지금 이 세대에 더더욱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 내야하는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의 교회는 많은 다음 세대를 잃었고, 그 원인으로는 기존 교회의 모습에 대한 회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 등 세대적 간극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다음 세대는 왜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는가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다음 세대는 참여를 강요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많은 청년들은 교회의 운영이나 행사에 참여하며 ‘왜 해야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그저 책임감과 의무를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고 말합니다. 의미를 모른 채 반복되는 참여는 결국 부담으로 다가오고, 원치 않는 일에 끌려다니는 경험이 교회를 멀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속이 빈 신앙, 즉 허례허식에 대한 실망감입니다교회가 진리를 가르치지만, 그 진리가 실제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동체의 현실에 깊은 괴리감을 느낍니다. 배움과 깨달음, 말은 많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공동체, 형식과 전통에 갇힌 신앙은 그들에게 공허하게 다가옵니다. 함께 모여 하는 일의 목적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진리와는 먼 것 같은, 개인이나 교회의 이익과 위상에 열심을 내는듯 보이기 때문에 실망합니다. 이는 교회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멀리하는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셋째로, 기존 교회를 등진 다음 세대들과의 대화에서 발견한 것은, 공감 없는 소통 방식 즉, 세대 간의 큰 차이입니다 교회내 기성세대의 가르침과 훈계가 관심이 아닌 ‘통증’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상처 위에 알부틴이나 빨간약처럼 너무 강한 약을 바르거나, 마취 없이 꿰매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돕고자하는 의도라도, 이해와 공감 없는 조언은 상처로 남고, 결국 교회를 등지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는 스웨덴, 독일 등 기독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온 다음 세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교회는 전통을 중시하며, 교회의 체계와 세력을 강화하는데 많은 힘을 쏟는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일 년에 한두 번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행사에는 참석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의 확신이 없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나 능력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위로나,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며,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했었지만 교회를 출석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다음 세대의 교회 기피 현상과 그 원인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기존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열심이 때로는 그들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다가가야 할까요? 그리고 과연 다음 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좋은 예로, 최근 미국에 큰 충격을 안긴 저격 사건의 피해자이자 정치인 찰리 커크 Charlie Kirk의 행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팀을 구성해서 1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캠퍼스를 찾아가, 성경 진리를 기반으로 다음세대와 대화하며 현실 문제에 대한 답을 함께 모색했습니다. 다음 세대와의 공식적인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다음 세대를 깊이 이해하고, 다양한 여러 문제들에 있어 진리를 중심에 두고자 하는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관계, 정치, 정체성 등 다음 세대가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대해 “사랑에 뿌리를 둔 진리”로 대답했습니다. 서로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왜곡된 현실을 지적하며, 동시에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전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어떤 이에게는 불편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해답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어쩌면 한국의 명동 길거리 한복판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던 전통적 거리 전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에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차이는 다음 세대를 향한 접근 방식에 있습니다. 그는 등을 돌린 다음 세대를 외면하거나 판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진리로 대화하기에 힘썼습니다. 때로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그의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로 다음 세대에게 ‘찐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좋은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겉으로는 무관심하거나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진짜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잠시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어쩌면 예수같은 어른들, 그리고 교회를 바라는 것입니다.
찰리처럼 대단히 큰 일을 해내지 않더라도, 내가 속한 곳에서 진심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그 진리를 삶으로 전하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는 꼭 필요합니다. 기성세대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또는 세대가 변했다는 이유로 이전처럼 큰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을 사는 크리스천은 세대를 뛰어넘어 영원으로 계속 전진합니다. 그 길에 함께하는 전심으로 기도하며 사랑하는 교회가 꼭 필요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행보를 같이 할 교회가 필요합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질 것이며, 다음 세대는 이를 보고 기꺼이 따라올 것입니다.
뉴질랜드는 겉으로는 평온한 나라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많습니다. 다음 세대는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서 예수님처럼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헌신된 공동체와 모범을 찾고 있고, 자신들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이 세대는 살아있는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과의 회복을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는 다음 세대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삶의 큰 원동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