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첫 봄

불만의 겨울, 고교 시절
셀리(Percy B Shelley)의 유명한 시(詩) 서풍부(西風賦)를 처음 읽은 때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오 거센 서풍, 너 가을의 숨결이여’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제법 길지만 아직도 이 시를 기억하고 때로 흥얼거릴 수 있는 까닭은 그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라는 의문 부호로 끝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나는 정말로 좋아했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는 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을 읊곤 했다.

고등학교 3년, 그 3년은 내게는 춥고 길기만 하던 겨울이었다. 그 지루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 것은, 내 삶의 첫 봄이 나를 찾아온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1967년 3월 나는 대학에 입학하였고, 그때를 나는 비로소 나의 삶이 피기 시작하였던 내 삶의 첫 봄으로 생각한다. 시꺼먼 교복과 무거운 교모에 갇힌 채 지겨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은 학교를 억지로 다녀야 했던 고등학교 3년은 내게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아직 어려서였는지 학교는 당연히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에 그런대로 다녔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왜 꼭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그냥 불만이었고 학교에서 하는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근저에는 입학시험에 실패해서 가고 싶은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2차 시험을 보아 들어간 학교이기에 학교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없었다는 이유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렇게 싫은 학교에 다녀야 했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어서 학교를 빠졌고 영화관을 순례했고 수업 시간엔 딴청을 쓰다가 선생님들께 지적당하기 일쑤였다. 성적은 내려갈 대로 내려가서 1학년 학기 말엔 60명인 반에서 40등 가까웠다. 내 성적표를 받아본 아버님께서 하도 기가 막히시는지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성적표를 내게 던지시며 “우리 집에선 전무후무한 일이다”라고 하시며 방문을 박차고 나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고생과의 풋사랑
2학년이 되면서 친구 소개로 여학생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꽤나 예쁘게 생긴 애였다. 공부도 잘해서 그 당시 가장 좋다는 K 여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랑 같은 학년이었다. 취미가 문학이라는 그 아이는 소설과 시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았다.


그 아이와 만나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닥치는 대로 문학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 그때부터 나는 학교 도서관 출입이 잦아졌다. 방과 후 귀가가 늦어지자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온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내심 안심하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 학교 성적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 아이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종로 2가에 있는 종로제과점이었다. 그날 그 아이와 같이 멋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나는 용돈을 모아 놓았고 그 돈으로 선물도 사주고 저녁도 같이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도 안 나타나자 나는 안절부절하였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아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는 곧 가야 한다며 앞으로는 더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 한참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아이는 나랑 만나는 것을 부모님이 아셨고 오늘도 못 나가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만나서 작별 인사만 하고 오겠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일어서려는 그 아이를 겨우 붙잡아 앉히고 나는 그렇다면 내가 부모님을 만나 뵙고 우리가 계속 건전하게 교제하도록 승낙해 달라고 부탁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그건 결코 안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고 내가 묻자 그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내게 말했다. “사실은…… 사실은…… 우리 엄마가 왜 공부 못하는 애하고 만나느냐고, 그럼 안 된다고 하셨어. 미안해 나 갈게.”하고 겨우 말을 마친 그 아이는 일어서서 나갔다.

공부 못하는 애
나는 무언가 무거운 것으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공부 못하는 애, 공부 못하는 애,’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애가 가버린 것도 다시는 그 애를 못 만날 것이라는 것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내가 공부 못하는 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안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달랐다.

때가 되면 언젠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어느 사이에 공부 못하는 애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제과점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지만 그 한가운데서 나는 참 오랜만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고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몸서리를 치면서 제과점을 빠져나왔다.

제과점을 나온 나는 몽유병자처럼 걷기 시작했다. 겨울 밤공기는 차가웠고 거리는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그 사람들의 틈바귀를 헤치면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공부 못하는 애’라는 그 아이의 마지막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시 내 가슴을 찔렀을 때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청계천 6가 쪽으로 힘차게 걸었다. ‘오늘부터 공부를 하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청계천의 헌책방 가로 향했다.

그 저녁 그 아이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모았던 돈으로 나는 ‘영어 연구’ 1-5권과 ‘수학의 정석’ 1-2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부터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부모님이 원하시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불만의 겨울이 지나고 내 삶의 첫 봄이 그렇게 왔다.

내 삶에 찾아온 첫 봄
대학에 입학하고 곧이어 봄이 되자 교정엔 진달래 철쭉이 만발하여 꽃동산이 되었다. 꽃밭 사이를 누비며 잔디밭을 거닐며 나는 내 삶의 첫봄을 만끽했다. 그리고 싱그러운 5월 처음 맞는 대학 축제에 나는 그 아이를 파트너로 초대했다. 나의 초대를 마다하지 않고 축제에 오긴 했지만 그 아이는 내내 말이 별로 없었다. 여전히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그 아이는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조용한 미소만 지었다.

여름 저녁 어둠이 우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았던 나도 말을 아끼고 있었다. 축제는 아직도 한창이었지만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교문을 나섰다. 그리고 집까지 배웅했다.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우린 누구도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뒤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나는 가끔 그 아이의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아쉬움이나 어떤 풋사랑의 연정이 아니고 아스라한 추억과 더불어 떠오르는 고맙다는 마음이다.


그 저녁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약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저녁 먹고 영화 보고 즐겁게 지내 버렸으면 아마도 내 삶의 첫봄은 아주 늦게까지 아니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등학교 3년, 내게는 길고 긴 겨울 같은 그 불만의 계절에 그 아이가 던져준 그 말 한마디 ‘공부 못하는 애’는 겨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나를 일깨워 봄을 맞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그 뒤 대학 1학년 때 읽게 된 셀리의 시 ‘서풍부’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는 살아오는 내내 그 아이의 말 ‘공부 못하는 애’와 더불어 내게 자극도 되고 힘도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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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