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유대 전쟁, 팔레스티나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73년 마사다에서 농성하던 엘르아자르와 마지막 저항군들이 집단 자살한 이후 로마군에 대해 저항하는 유대인은 없어졌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제10군단 사령부가 주재했고, 예루살렘은 완전한 황무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대신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적대했던 시리아인, 그리스인들이 거주했다. 그러나 흩어진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관 속에 숨어 탈출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지중해의 얌니아(야브네)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했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하지 않았으나 성전산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했다.

벤 자카이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제자들에게“슬퍼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또 다른 속죄가 있다. 그것은 자비의 행위들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성전 없는 현대 유대교의 시작이었다.

유대인 중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 야고보를 이어서 글로바(누가복음 24:18)의 아들 시몬이 2대 감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성전의 잔해를 이용해 회당을 짓고 기도처로 삼았는데, 유대교도처럼 예루살렘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의 예언과 새로운 계시가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예루살렘은 실패한 종교의 잔해일 뿐이며 요한계시록은 성전을 어린양으로 대체했다(요한계시록 21:22). 최후의 날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요한계시록 21:2).

벤 자카이가 중심이 되어 유대인 율법학자들은 AD 90년 얌니아에서 우리가 구약 성경이라고 하는“타낙”을 정경으로 정하였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헬라어로 된 성경이 있었다.

헬라어로 된 성경은 70인역 성서(셉투아진트)라고 부르는데 기원전 2~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랍비 72인에 의해 번역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토라(모세 5경)가 먼저 번역되고 이후 100여년에 걸쳐 다른 부분들이 추가되었다. AD 90년 얌니아에서는 히브리어 사본이 있는 39권만 정경으로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토라(모세 5경), 느비임(예언서), 케투빔(성문서)가 포함되며, 첫 글자 T, N, K를 따서 타낙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대교의 경전(구약)을 성경으로 채택하였다. 4세기 말 로마 주교(교황) 다마소 1세의 의뢰로 히에로니무스(제롬)는 70인역 성서와 함께 히브리어 성서를 원본 토대로 하여 구약성서를 새롭게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AD 406년에 완성되어 중세교회의 표준이 된 불가타역 성경이다.

불가타역에는 70인역에 있는 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현대 카톨릭에서는 얌니아에서 제외한 책들을 제2경전(공동번역에서 외경으로 분류)으로 동일한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그것을 외경으로 분류하여 제외하고 동일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개신교가 정경으로 채택한 구약성경은 얌니아에서 정한 타낙(39권)과 일치한다(순서와 분류는 조금 다르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2년만에 죽었다. 유대인들은 그의 요절을 신의 벌이라고 믿었다. 티투스를 계승한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을 탄압하는 세금을 유지했고, 자신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고 네르바가 왕이 되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약간 완화하였으나 헛된 기대감만 주었을 뿐 별 의미가 없었다. 그 다음은 유능한 장군 트라야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의 등장은 그리스도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고, AD 106년 예루살렘교회 2대 감독 시몬이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로마의 속주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유대의 멸망을 기뻐했으며, 네르바 황제 때 완화되었던 유대인 인두세를 부활시켰다. 알렉산더의 숭배자인 그는 영토 확장을 좋아하여 파르티아(이라크)를 공격하여 로마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때 유대인들은 아프리카, 이집트, 키프로스 등지에서 수천 명의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을 학살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는 반역하는 유대인들을 말살하기로 작정하였고 유대인들은 확실히 로마제국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유대 문제를 근원적으로 끝내버리고 싶어했다. AD 130년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해버릴 계획을 세웠다.

즉 폐허가 된 옛 도시 자리에 새로운 로마 도시를 세우고,‘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불러 예루살렘이란 이름을 지우려 했다. 두 개의 주요 도로를 닦고 두 개의 광장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한 광장에 주피터 신전을 세우고 아프로디테상을 두었으니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곳이었다.

또한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의 거대한 동상을 세웠다. 그는 BC 160년경 마카베오 혁명을 촉발시켰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연구했고 본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죽은 후 네 명의 장군이 헬라제국을 분할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유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리아 셀류쿠스왕조이다. 이 왕조의 8대 왕 안티오커스 4세는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하여 ‘에피파네스(Epiphanes)’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백성들은 그를 조롱하여 에퓨마네스(미친 놈, Epumanes)이라 불렀다. 미친 왕 에피파네스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헬라화 정책을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유대인의 종교 자체를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BC 167년 안식일에 계략을 써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 안의 모든 희생제사와 예배를 금지했고 안식일, 율법, 할례를 금지하였다. 또한 돼지고기를 제물로 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은 제우스에게 바쳐졌으며 희생제물은 안티오커스 왕 자신에게 봉헌하게 하였다.

늙은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모여 봉기하였고,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반란은 마침내 안티오커스를 굴복시키고 유대인들의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망치’라는 별명을 얻은 사령관 유다(BC166~160)를 이어서, 그의 동생 요나단(BC160~142)과 시몬(BC142~134)이 대제사장 및 사령관이 되어 해방전쟁을 이어갔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BC134~104)가 대제사장 및 왕이 되어 이스라엘은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이래 처음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루었다. 이 하스몬 왕조는 BC 6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점령당하여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연구하여 유대인들의 저항을 완전히 소멸시키려 하였던 반면 유다 마케베오의 혁명을 꿈꾸던 시몬 바 코크바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AD 132년에 유대전쟁을 시작했다.

‘코크바’는 ‘별’이란 뜻이고, ‘바’는 히브리어 ‘벤’과 같이 아람어로 ‘아들’이란 뜻이다. 바 코크바는 곧 ‘별의 아들’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는 민수기 24:7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한 별이 바로 그라고 여겨서 부른 것이며, 당대에 유명했던 랍비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주장하고 그를 중심으로 유대해방전쟁에 나설 것을 독려하였다.

바 코크바는 로마 총독과 로마군 2개 군단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으며, 헤로디온을 근거지로 하여 이스라엘의 나시(왕)가 되었고, ‘이스라엘 해방 제1년’이란 연호를 새긴 동전을 발행했다. 유대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바 코크바를 메시아로 부를 수 없었고, 바 코크바는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박해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최고의 장군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영국에서 불러들여 바 코크바 반란을 진압하게 하고, 이 기회에 아예 문제의 뿌리를 뽑기로 하여 철저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AD 135년에 바 코크바는 자살하였고 유대군은 진압되었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땅 50개 소도시와 985개의 촌락들이 폐허가 되고, 유대군 58만 5,000명이 전사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질병, 화재로 죽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가 되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뀐데 이어, 유대라는 땅 이름도 블레셋의 땅이라고 하여 ‘팔레스티나’로 바꾸어 불러서 오늘날까지 그 지역 이름이 되었다. AD 70년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후에 그나마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근거가 그 땅에서 철저히 소멸되었다.

유대인들은 다시 흩어졌지만 이후에도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갈망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살든 하루 세 번씩 유대의 회복과 성전의 재건을 위해 기도했다.

성전 회복을 대비해서 성전 의식을 모아 놓은 책이“미쉬나”이다. 중간에 몇 차례 성전회복의 기회가 있는 듯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유대인들은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대두와 함께 대량으로 이주하고 1948년에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거의 1800년 동안 그 땅은 유대인과 무관한 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