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젊은 시절 잡지사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유명 인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는 매달 누구를 인터뷰해야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까 고민했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독자를 대신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인터뷰를 했다. 내가 예수를 인터뷰할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잡지사 기자 시절을 회고하다가 불현듯 들었다.

10여 년 전 40대 중반의 나이에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부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갈수록 더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때로는 주석서를 뒤지며 이해되지 않는 성경 구절에 대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교리서를 탐독하며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갖고 있는 이 궁금증들을 예수를 만나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바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눈에 보이듯 선명해지겠지만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서 그 일을 하고 싶었다.

잡지사 기자 시절 독자들을 대신하여 유명 인사를 인터뷰 하듯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 인터뷰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벌써 2천년 전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하지만 그는 부활했고 여전히 지금도 살아있지 않는가? 인터뷰를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좀더 생생한 인터뷰를 하고 싶어 예수가 이 땅에 살았던 그 시점으로 내가 돌아가서 거기서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첫 번째 인터뷰: 십자가에 대해
내가 예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만난 시점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기 전날 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막 첫 번째 기도가 끝나고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해줄 것을 부탁한 후 다시 엎드려 기도를 하려고 자세를 잡으려던 때였다.

나는 그가 매우 심란해 하고 있을 시점임을 알고 있었기에 몹시 미안했으나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을 생각해서 잠시 시간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미리 알았다는 듯이 심란한 과정에서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인터뷰에 응하기 위해 한 나무 그루터기에 편히 앉았다. 나도 그의 말을 잘 듣기 위해 최대한 그에게 가까이 가서 앉았다.

가까이서 그를 보니 비록 달빛 아래였기는 했어도 확실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온 배우 짐 카비에젤 (Jim Caviezel)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 동안 영화에서 보던 미남 배우들의 모습은 확실히 아니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자국들이 얼굴에 남아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수염을 깎지 않아서 그런지 30대 초반치고는 수염이 덥수룩한 것이 요즘으로 치면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의 외모는 정말 이사야에서 나온 것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초라하였다(이사야 53: 2). 덩치가 나와 비슷하게 별로 크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인터뷰는 사진 촬영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기에 나도 그의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확실히 영화에서 보던 예수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의 외모가 어떻든 나로서는 세기적인 인터뷰를 시작하자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좀 떨렸다. 그래서 대개의 인터뷰가 그러하듯 통상적으로 당장 큰 일을 앞둔 그의 심정부터 물어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고통스런 십자가 형을 받으셔야 할 텐데 지금의 심정은 어떠세요? 많이 힘드시죠?”

그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으나 그래도 목소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힘들지. 그러나 어쩌겠어. 아버지와 한 약속이고 그 분의 뜻에 따라야지. 그리고 고통 없이 어찌 영광이 주어지겠니?”

어라, 나는 그래도 유명 인사이기도 하고 공식적인 인터뷰 대상자이기도 하여 나보다 25년은 젊었지만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데 그는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말하듯 나에게 반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국말에 서툴러 존댓말을 쓸 줄 몰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보기에는 젊어도 나보다 생년월일은 2천 년이나 앞서기 때문에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무슨 왕이나 어른에게 대하듯 존댓말을 쓸 것 없이 친구처럼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다음부터는 존댓말과 반말의 어중간한 형태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왜 사서 고생하나 모르겠네. 유대인들은 당신을 죽이고 싶어도 형사 재판권이 없어 로마 총독에게 데려가야 하고 로마 총독은 복음서에 따르면 당신을 굳이 죽이고 싶어 하지 않으며 몇 대 때리고 놓아주고 싶어하던데… 그러니 말만 잘하면 굳이 십자가 형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던데…”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어떻게 말하면 되는데?”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야, 복음서를 보니 유대인 대제사장이 당신을 심문하면서‘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질문했을 때‘그렇다’고 대답하는 바람에 그들을 노하게 만들어 당신을 신성모독죄로 죽이려고 한 것 같으니 앞으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든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허허, 그럼 나보고 거짓말을 하란 말이니?”그가 되물었다.
“거짓말이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 좀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어쨌거나 그게 거짓말이라면 당신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데…” 그래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목숨을 걸고라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는 건데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신의 아들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그냥 놔두시는 거지? 그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인가?”
이때부터 예수의 표정은 진지하게 바뀌어갔다. 그는 대답했다.

“그거야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내가 대신 너희 죄를 짊어지고 죽어가기로 아버지와 약속했기 때문이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 죽을 만큼 너희 죄에 대한 형벌이 엄중한 건데 누가 그것을 받겠니? 너희가 그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각자 받을래? 너희는 그런 형벌을 받아도 구원에 이르지 못해.
왜냐하면 그 형벌은 너희 죄에 대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너희가 받는다고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 너희가 너희 죄로 인한 형벌을 면하려면 누군가 죄가 하나도 없는 자가 너희를 대신해서 그 형벌을 받아주어야 가능한 건데 인간 중에 누가 그럴 수 있겠니?
그래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에 죄 없는 내가 너희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형벌을 받기로 정하신 것이고 그 죄는 너희 인간이 지은 것이라 내가 인간으로 보내져 이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된 것이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드디어 기독교 교리 중 구원론의 핵심적 내용이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와 관련하여 본격적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당신의 십자가 처형은 분노한 유대인들의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집단적 광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가운데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이 아닌가? 맞는가?”

그는 답했다.
“그렇다. 자신의 아들이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져서 이렇게 고통 받고 힘들어 하여도 이 일을 진행하는 이유는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분의 깊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십자가 처형을 피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지 않고 계시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그 구원의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도대체 인간을 구원한다고 했을 때 무엇으로부터 구한다는 말인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함이지. 죄로부터 너희를 구해냄으로 죄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죽음(로마서 6:23)에 이르지 않고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지. 내가 일찍이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리라는 약속을 했는데 들어보지 못했느냐? (요한복음 3:16)”

“그럼 당신의 이 십자가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모두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너희가 익히 보고 알듯이 인간은 육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너희는 죽어서도 영원히 그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확실한 사실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 이유가 죄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가 말한 사망의 늪이란 성경에서 나오는 지옥 또는 불 못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하면 죽어서도 영원히 지옥 불에 고통을 받는다는 말인데 도대체 믿기지 않는 논리 같았다.

물론 이 논리는 예수 이후 기독교인들이 늘 하는 말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들을 때마다 늘 황당무계하게 느껴져 예수에게 직접 그 근거를 차근차근 묻고 싶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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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연세대 졸업. 한국 워킹우먼 전 편집장. 해밀턴 지구촌교회에서 집사로 섬기고 있는데, 2016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2년 여의 항암 투병기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만난 예수를 인터뷰 형식으로 쉽게 풀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음의 핵심을 함께 나누고자 이 글을 썼다. 2018년 1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유고를 분재한다.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른 시각의 기사가 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