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속에 거하는 삶

정성민 담임교역자<퀸스타운순복음교회>

뉴질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그 중에서 퀸스타운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만할 정도로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아침과 저녁마다 태양 빛으로 물들여지는 하늘, 추운 겨울 따스한 아침 해가 호수를 달굴 때 피어나는 물안개, 어두운 밤하늘에도 달빛을 안은 눈이 그려내는 뚜렷한 산세, 비가 하늘의 먼지를 씻어내어 해님이 맑은 얼굴로 방긋할 때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호수와 하늘을 잇는 약속의 무지개, 호수에서 힘차게 고개를 들며 나와서 다시 호수로 들어가는 일곱 빛깔 무지개, 산기슭 곳곳에 드러나는 쌍무지개, 이뿐입니까? 봄과 가을, 그리고 여름 어느 계절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은 그 아름다움에 취하게 만듭니다.

호수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탈 때 이마에 와 닿는 바람과 코끝에 느껴지는 향기는 퀸스타운의 아름다움을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호수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갈 때 눈에 밀려 들어오는 광경들은 아름다움으로 나를 씻어 주는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축복임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한 날 퀸스타운에서 만난 교수님이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커피 한잔과 함께 퀸스타운 전경을 바라보며 묵상하시던 중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퀸스타운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했더니 조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날카롭고도 웅장하게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간 뾰족한 산세와 높지 않는 구릉진 언덕 같은 산과 나무들 그리고 호수, 이들의 다양한 모습이 조화롭게 있다 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 저도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어느 하나만 있다고 해도 멋있다고 할만하겠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질서 있고 조화가 되니 아름다움을 더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섭리 아래 만물이 질서 있게 조화된다면 그분의 아름다운 능력은 시간을 따라 달음질하는 만물에게 쉼과 회복으로 계속 마지막 때까지 달음질 할 수 있도록 해줌을 알게 됩니다.

전 세계를 뒤흔들며 우리의 일상을 빼앗은 COVID-19 사태도 인간의 탐욕과 거짓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깨뜨려 버렸기에 이토록 어려움들이 있는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의 아름다운 능력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질서를 잡아 주실 줄 믿고 내일을 기대해봅니다.

새벽 미명 물때를 맞춰서 바다에 김을 채취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아침 해가 뜨지 않은 시간 물이 들어오기 전에 빨리 김을 채취를 해야 했습니다. 그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바위를 긁던 중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아침 해의 아름다움은 김을 빨리 채취해야 한다는 사명을 한순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손을 멈추고, 바위 위에서 일어나 눈부신 바다 위의 태양을 실눈을 뜨고서라도 바라보도록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이 경이롭게 우리를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이 정도인데 아름다움의 주체자,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단어로 가히 다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연의 놀라운 아름다움을 보고도 입이 쩍 벌어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면 얼마나 황홀하여 할렐루야도 외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몸이 굳어 버릴까요? 사도 요한이 주님을 볼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요한계시록 1:17)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름다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경험할 때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호수 위로 햇살이 별을 띄울 때 그 옆을 걷는 것만으로도 지친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린 소녀들이 떨어지는 낙엽만 보고도 깔깔깔 웃는 소리 안의 아름다움은 순수했던 내 어릴 적 그때를 떠오르게 하여 행복해지고, 갓난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며 모유를 수유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절로 나에게까지 풍성한 사랑이 흘러옴이 느껴지는 행복감을 줍니다.

인간은 이렇듯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낄 때 행복해 지고 그렇기에 아름다움을 쫓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에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우리의 믿음의 선배 다윗도 평생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시편 27:4)을 소망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능력을 표현해 보려고 시도를 많이 해 봅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파란 하늘을 분홍빛으로 표현해 보고, 요즘은 놀라운 기술적 발전으로 8000픽셀의 해상도 디바이스를 통해 표현도 해봅니다. 하지만 5G 시대로 AI가 아무리 진보 발전한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따라 하지는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도 없고, 어떤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능력이 있습니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하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할 수 있는(이사야 1:18) 죄를 지워낼 수 있는 능력, 그 아름다움의 극치, 어느 누가 와서 변론을 한다 해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십니다.

놀랍고 감사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선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 은혜의 아름다움을 맛본 자들은 결코! 절대! 이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말 밥그릇(말구유)이었지만 가장 아름다움 그 자체가 육신을 입어 그 자리에 임했을 때는 냄새 나고 더러운 말 밥그릇 자체가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듯 우리의 삶에 이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입을 때, 거할 때, 머물 때, 오염되어 질서가 깨져 있는 고장 난 삶이라고 할지라도 쉼이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다시 만물을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안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다윗이 계속 이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바라고 바라는 것을 나의 평생의 소원이라 하는 그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자연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눈으로까지 담기는 하지만 그 자연 만물 속에 깃든 참 아름다우신 주님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까지 아름다움을 기록해 주셨는데도 그 참 아름다움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왜곡된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겨 참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세상을 계속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게(이사야 5:20) 하며 왜곡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힘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를 깨뜨리려고 발악을 할 것입니다.

참 아름다움을 입은 우리가 이 세상에 이 아름다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 쉼과 회복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한번 입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이 옷을 입고 있는 상태, 매일 아름다움 안에 거하고 있는 삶을 말합니다. 아름다움이신 예수의 옷은 먼지와 때가 묻어서 갈아입어야 하는 옷이 아닙니다. 먼지와 때를 씻기는 옷이기에 빨아야 한다거나 벗을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힘들 때도 이 옷을, 기쁠 때도 이 옷을, 비바람이 불 때도 이 옷을, 화창할 때도 이 옷을 입고 매일 아름다움 안에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