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와 한인교회

전희동 목사<오클랜드 디아스포라교회>

“이웃을 도왔고, 사회는 환자 돕기 위해 나서”

세계 1차 대전이 막 끝났던 1918년부터 시작해서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던 스페인 독감은 당시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100년 만에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페인 독감은 젊은이와 빈곤한 나라에 치명적이었던 것에 비해, COVID-19는 노인과 부유한 나라에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담 탄생부터 대략 5950년 동안, 인류가 결코 경험 못 해본 초 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 유행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COVID -19도 이른 시간 안에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COVID-19 상황에서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즈음 방역에 있어 세계적인 모범을 보이는 뉴질랜드이지만 스페인 독감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1918년, 두 번째 유행이 진행되었을 때, 10월에 도착한 바이러스는 연말까지 불과 두 달 동안 9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독감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던 마오리의 사망률은 파케하의 8배에 달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도 뉴질랜드 국민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스터프(Stuff)지는 ‘이웃은 이웃을 도왔고, 지역사회는 환자를 돕기 위한 조직을 신속히 만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런 신속한 조치는 전쟁으로 국민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는 것과 이웃사랑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떠받는 기독교인 수가 1920년까지 유럽의 인구 90%(3 /4가 개신교)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100년 전의 상황과 아주 다르다. 공중보건은 고도로 발달하였고 환자의 치료는 조직화한 의료 기관이 잘하고 있다.

정부는 COVID-19로 인해 직업을 잃고 수입이 끊어진 이들을 위해 신속하게 지원에 나섰다. 100년 전처럼 시민과 교회가 나서서 이웃을 도우려고 조직을 만들 필요는 적어 보인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뉴질랜드 정부가 이번 록다운 기간, 국민에게 홍보했던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이웃에게 친절히 해라’는 것이었다.

100년 전, 미국 뉴욕 11번가 감리교회 목사였던 플레쳐 페리쉬 목사는 ‘유일한 안식일’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집 안에 꼼작 없이 갇혀 지내야 했던 교인들에게 록다운 기간은 쉼 없었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성찰과 묵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록다운 기간, 가족과 함께 한 ‘버블’ 속에서 지내는 기간을 가졌다. 그동안 충분히 가져보지 못했던 가족과의 시간이 갈등과 반목의 시간이 아니라 가족애와 친밀함의 시간일 때 자기성찰과 묵상의 시간에 더해, 축복의 ‘유일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100년 전 교회 폐쇄로 설교가 전해지지 못하던 때, 설교는 인쇄되어 집집이 전달되었다. 인쇄의 과정을 거쳐 전달되는 설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면서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과거 인류가 경험 못했던 초연결 사회는 우리에게 크나큰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온라인 연결 후, 전에 교회에 참석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사람이 접촉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

최근 있었던 ‘40일 금식기도회’에서는 40여 명의 한인교회 리더들이 회개하며 뉴질랜드 부흥을 위해 온라인에서 40일 동안 만났다. 1세대부터 2세대 리더까지 함께 참여한 이 모임은 한인 모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파케하와 마오리가 함께 어울리는 기도회였다. 오프라인에서 이런 모임을 계획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 온라인과 록다운이 가능케 했다. COVID-19을 재앙으로만 여길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 한인교회여, 일어나라

공식 이민역사 120년을 맞이하는 한인 디아스포라, 2019년 현재 대략 750만 명이 세계 곳곳에 퍼져 살고 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하나님은 그 손길로 뉴질랜드의 한인교회를 어디로 이끌고 계신 걸까?

1984년 3월 11일 창립된 웰링턴 한인연합교회를 뉴질랜드 한인교회의 첫 역사로 본다면 올해로 36년이 된다. 첫 1세대가 주축을 이루었던 이민 사회는 이제 이민 2세대들이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전환점을 맞이하는 한인교회는 뉴질랜드의 선진들에 의해서 뿌려지고 키워진 영적 유산의 토대 위에 있다. 이제 성장의 단계를 맞이하는 한인교회가 계승할 이곳의 영적 유산은 무엇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민의 주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삶’
한인들의 공식적인 이민의 첫 역사는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이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제물포에서 예배로 준비하고 출발했다. 그들이 이민을 택했던 것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였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당시 ‘ 더 나은 삶’은 돈을 버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뉴질랜드 이민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 주로 먹고 살만했던 사람들이었던 뉴질랜드 이민자의 ‘더 나은 삶’은 재정적인 것을 뛰어넘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자녀교육이었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가 덜한, 더 나은 사회에서의 삶이었을 수도 있다. 이민의 주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삶’이다.

‘더 나은 삶’ 찾아 캐나다로 떠난 스코틀랜드인
오클랜드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왕가레이 조금 못미처 동해에 자리 잡은 ‘와이푸’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에 ‘와이푸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뉴질랜드에 온 스코틀랜드인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산업혁명의 여파가 곳곳에 퍼지던 시절, 영국은 양모생산으로 큰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더 많은 양을 기르기 위해 전국 곳곳이 목장으로 개간되었고, 영국의 북쪽, 스코틀랜드에 있는 하이랜드라는 척박한 고지대마저 양을 기르기 위한 곳으로 바뀌어 갔다.

고지대에서도 잘 견디는 양의 생산은, 농사를 지으며 척박한 땅, 하이랜드에 살던 소작농을 그들의 터에서 떠나도록 밀어내고 있었다. 터를 잃게 된 그들은 새로운 땅, 캐나다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미 캐나다 동쪽 노바스코샤주의 픽토우에는 다수의 하이랜더가 새 땅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곳에 스코틀랜드인으로 에든버러에서 신학 과정을 이수한 노먼 맥레오드 목사(1780.9.17–1866.3.14)도 있었는데 그는 1817년, 픽토우로 이주하였다. 이듬해 그를 따르는 150명이 스코틀랜드에서 픽토우로 이주해 왔다. 이주해 오는 많은 이들로 픽토우가 번잡해지자 노먼 목사는 교인들을 이끌고 그곳에서 100마일 떨어진 케이프 브레턴 섬의 ‘세인트 앤’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세인트 앤’에 이주한 최초의 스코틀랜드인이었지만 곧 본토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먼 목사 주변에는 경건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으로 알려진, 대략 1백만 명이 죽은 대기근이 그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세인트 앤’을 얼음으로 가두어 생필품의 공급도 막아 버렸다. 농사가 힘들어지자 노먼 목사는 새로운 땅을 찾게 되었다.

다시 ‘더 나은 삶’ 찾아 호주 거쳐 뉴질랜드에 정착
68세의 노먼 목사는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기 위해 두 척의 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곳은 호주의 애들레이드였다. 1851년 11월 초 150명의 교인을 이끌고 첫 번째 배인 ‘마거릿’으로 캐나다에서 출발한 노먼 목사 일행은 도중에 케이프타운에 잠깐 들렸다가 1852년 4월에 호주 애들레이드에 도착한다.

이어서 또 다른 155명의 교인을 태운 ‘하이랜드 라스’배가 10월에 도착했다. 그러나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애들레이드에는 탐욕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여섯 아들 중 세 아들이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그는 거짓 신을 숭배하는 형벌이 이곳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또 다른 정착지를 찾게 되었는데 1853년 초, 노먼 목사는 뉴질랜드의 지사였던 조지 그레이 경에게 그들이 정착할 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1853년 9월 21일, 그들은 뉴질랜드 북섬에 상륙했다.

1859년 말까지 4척의 선박이 더 도착하여 1860년경에는 와이푸에 이주해 온 스코틀랜드인은 883명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더 나은 삶’을 찾는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노먼 목사의 이민 이야기는 이 땅 뉴질랜드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 신앙 선진의 한 예이다.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단어는 ‘하나님 나라’였다.

이곳 뉴질랜드는 ‘스티븐 핑커’가 진단한 대로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 때도 ‘애초에 대단해지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나라’였다. 왜 그랬을까? 적은 인구에 남태평양 구석에 자리한 섬나라라서? 이런 지리적인 점도 반영되었으리라.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진정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는 1920년까지 유러피언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나라다. 1970년대 뉴질랜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추구하는 한인교회
이곳 한인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뉴질랜드 신앙의 토양 위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이 한인교회가 첫 번째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인을 가까운 가나안 땅으로 바로 이끌지 않고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했을까? 신명기 8장 16, 17절에서 하나님은 그 대답을 들려주신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사람은 무엇인가를 이루면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데서 출발한다.

나의 공부할 수 있는 능력, 부지런함, 기억력, 재능, 내가 모은 재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어디서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통해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더 나은 삶’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 얼마 안 되는 제자를 모아놓고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고 예언하셨다(마태복음 24:14). 놀랍게도 하늘나라의 복음은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고 있다.

뉴질랜드의 한인 차세대는 잘 준비된 선교의 보물
지금 한인 크리스천들은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2019년 말 기준, 한국교회가 파견한 선교사는 171개국 28,039명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위치한 10/40의 창을 들여다보면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한인들이 복음을 전하기에 최적화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한국의 빠른 발전상은 그들의 관심사이며 한류는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상황에서 뉴질랜드의 한인교회는 잘 준비된 선교 자원이다. 다 문화권에서의 삶의 경험과 이중 언어 구사능력은 선교를 위한 좋은 준비물이다.

예전에 해외에 파송된 한인 선교사가 뉴질랜드에 와서 1.5세대를 바라보며 ‘이들은 선교에 있어서 보물이에요’라고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두 나라, 대한민국과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좋은 자원이다.

뉴질랜드의 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 2001년 58.92%였던 기독교 인구는 7년 만에 36.7%까지 줄어들었다. 이 땅 뉴질랜드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나라로 변해가는 중이다. 한인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룩했던 뉴질랜드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뉴질랜드 한인교회 36년 역사의 전환점을 맞는 뉴질랜드의 한인교회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