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없으면 근사한 날은 오지 않아

올 한 해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때론 소소하게 때론 아주 특별하게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보면서요.

그러면서 생각을 해봤어요. 일상이란 게 어떤 건지 혹은 소소한 건 뭔지. 뭐 별일 없이 너무나 평범해서 시시하다고 여겨지는 반복된 하루하루를 말하는 거라면 저는 아니라고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일상은 기본 중에 기본이고 뭔가가 생기게 해주는 원천이죠. 만일 우리의 인생을 건물로 비유한다면 향기 나는 꽃나무 화분을 세워둔 현관문이나 멋진 그릇들에 예쁘게 담긴 음식이 있는 식탁,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 걸린 거실만으론 건물을 지탱할 수 없으니까요.

살면서 빛나는 순간에 대한 소망이나 아니면 그리움을 갖게 되지만 말입니다. 건물을 받쳐주는 기둥과 바닥 지붕 같은 그런 일상이 없으면 근사한 날은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일상은 감사가 되고 자랑이 되고 이제는 이야기 꺼리도 되었습니다.

오래 전 이기는 합니다만 10년동안 가지 않았던 한국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이민 와서 한차례 아직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한국 친정 나들이를 다녀온 이후로 시댁 식구들은 뉴질랜드에 계시고 친정 식구들도 자주 내가 있는 이곳으로 다니러 오시고해서 한국방문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도 제법 크고 살림도 시어머니께 부탁하고 혼자서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3주간 지나면서 만난 사람들은 다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잡아 안정되게 살고 있는 친구들이나 경력사원으로 회사에서 중요한 직책에 있는 친구들이나 지인들, 새로 조성된 청계천을 산책하면서 보게 되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에서조차 그랬습니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너무 빡빡하게 살아서 그랬는지 많이 부러웠어요.

그러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입니다. 소박한 오클랜드 공항에서부터 시시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도 그저 철없어 보이고 낮은 건물들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남편이 픽업하러 타고 온 차도 그 남편도, 돌아와서 해야 되는 내 직장 일도 너무 시시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심한 건 나, 잘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쪼들리며 사는 살림에 내년에도 후년에도 나아질 것 같지않은 그 생활 때문에 생긴 마음의 우울감이 몇 달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일하던 가게가 주인이 바뀐다는 겁니다. 그 말은 내 직장이 없어진다는 말이거든요. 알량하나마 거기서 받은 주급으로 시장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차에 기름도 넣고 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그때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우중충하던 게 싹 걷히면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달아졌습니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상실감보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걸 누리며 사는 평범한 일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사의 제목인 것을요.

며칠 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늘 다니던 길에서 울컥해진 이야기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끝이 뾰족하게 긴 삼각형 모양이잖아요. 그런데 이 나무는 흔히 오클랜드에서 볼 수 있는 둥그스름하게 생긴 커다란 활엽수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커다란 빨간 리본들이 온통 달려 있는 거예요. 그 나무가 그 집 정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손으론 닿을 수 없는 키 큰 나무 전체를 아주 꼼꼼히 빨간색 리본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혹시 노란 손수건이란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부터 있어왔던 샘터라는 작은 잡지에 실린 실화였다고 기억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에 어느 마을에 사이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남편이 무슨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가족은 너무 가난하고 교도소도 너무 멀어 면회도 못하고 지내다가 형을 다 마치고 출옥하게 된 남편이 부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제 출옥하게 돼서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내가 집으로 아내 곁으로 돌아가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좋으면 집 앞 큰 사과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놔 주라. 만일 그 나무에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으면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떠나서 가족과 상관없이 살겠다고 하고는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집을 지나 더 멀리 갈 마음의 준비도 하고 집 근처에 도착을 했는데 멀리서도 이미 보이는 수많은 노란 손수건들이 사과나무에 매달려 바람에 날리는 겁니다. 왜 난 이 빨간 리본이 달린 나무를 보면서 노란 손수건이 생각나면서 울컥해지는지.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그저 창의적인 크리스마스 장식이었는지 모르지만 난 그랬습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그렇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준 적이 있었나 그게 언제였던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일상은 어려워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아 지루하고 지치기도 합니다. 매일 차리는 식탁은 특별한 날 한끼의 요리보다 어렵습니다. 열렬했던 연애시절보다 결혼생활이 어렵습니다. 치워도 끝이 안 나는 가게 정리도, 늘 비슷하게 실수하시는 시어머니도 매우 어려운 나의 일상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찾아지는 작은 기쁨과 보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제 오늘 종일 코스튬에 시크릿 바코드를 붙이는 지루한 일을 하면서
난 크로아티아 바닷가 마을을 상상한다.
거기서 걷고 거기서 바람맞고 거기서 커피 마시는
그러다가 이탈리아 어느 섬마을로도 옮겨간다.
내 이 지루하고 고단한 수고가 그 빛나는 며칠을 보상해주리라 믿으며…

혼자만의 여행을 꿈꿔 온 지 몇 년째 되었는데 드디어 떠나게 되었답니다. 2월 중에 크로아티아에서 며칠, 로마 피렌체에서 며칠, 한국에서 두주 이렇게 다녀오는 일정으로 떠납니다.

뭐든 어렵지 않은 사람한테는 별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유럽을 처음 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해서 얼마나 설레고 즐거운지 몰라요. 겁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훨씬 많이 신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