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스토우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리그리가 톰에게 채찍을 넘겨주었다.
“자, 이 채찍으로 루시를 때려라.”
톰의 얼굴빛이 변했다
“주인님, 그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리그리의 채찍이 톰의 얼굴을 갈겼다.
“이래도 못해? 너희들의 하나님은 바로 나라고 한 걸 잊었느냐?”
그 자리에 고꾸라졌던 톰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왔지만, 내 영혼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지문 편집)

우린 지금 미국작가 해리엇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1852년에 발표한‘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읽고 있다. 이 작품에 묘사된 흑인노예들의 비참한 삶은 미국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남북전쟁(The Civil War)의 기폭제가 되었단 평을 듣는다.

남북전쟁(1861.4-1865.4)이 치열하던 1862년 11월, 링컨 대통령은 작가 스토우 부인을 워싱턴으로 불러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당신이 이 큰 전쟁을 일으킨 책을 썼던 작은 여인이군요.”(So you’re the little woman who wrote the book that started this great war.)

잠시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켄터키주의 쉘비(Shelby) 농장에서 두 명의 노예가 노예상에게 팔려간다. 톰(Tom)과 일라이자
(Eliza)의 어린 아들 해리(Harry)가 노예상인 해일리(Hayley)에게 팔렸다. 쉘비는 좋은 주인이었으나 사업에 실패해 큰 빚을 진 까닭이다.

일라이자는 그날 밤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친다. 톰은 주인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순순히 따라 나섰다. 해일리를 따라 배를 타고 가는 중에, 톰은 배에서 떨어져 익사할 뻔한 어린 소녀 에바(Eva)의 생명을 구한다.

에바의 아버지는 딸을 구해준 톰을 해일리에게서 사들인다. 에바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지만, 폐결핵에 걸려 어린 나이에 그만 죽고 만다. 아버지는 에바의 유언대로 톰에게 자유를 주려 했지만, 그 절차를 밟기도 전에 술집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톰은 다른 주인에게 팔려간다. 새 주인은 사이먼 리그리(Simon Legree)라는 폭압적 인물이었다. 리그리는 노예를 짐승이나 물건 따위로 취급하는 사악한 주인이다. 톰은 목화밭에서 채찍에 시달리며 힘들게 일했다. 리그리는 노예들 사이에서 신망이 좋은 톰을 감독자로 쓰려했다. 충성을 강요하며 노예 루시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 톰이 거부하자 리그리는 되려 톰에게 채찍을 휘둘러댔다(위 지문의 장면).

리그리는 성적으로도 사악했다. 캐시(Cassy)와 에멀린(Emmeline)이란 두 여자노예를 성노예로 희롱해왔다. 둘은 탈출을 시도한다. 리그리와 그의 부하들은 둘의 행방을 찾기 위해 톰을 혹독하게 때린다. 톰은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오히려“주인님, 나는 당신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며 죽어간다.

첫 주인인 쉘비의 아들 조지(George Shelby)가 톰을 다시 사들이려고 리그리를 찾아오지만, 톰은 이미 죽은 뒤였다. 조지는 톰을 묻고 켄터키 본가로 돌아가 톰의 죽음을 알린 후 모든 노예를 풀어준다.

한편, 아들 해리를 데리고 도망쳤던 일라이자는 남편 조지 해리스(George Harris)와 재회한다. 해리스 역시 도망자로서 현상금까지 걸려있었지만, 노예사냥꾼과 대치하면서 자신이 자유인이라고 역설한다. 해리스 가족은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백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노예제가 없는 캐나다로 건너간다. 

소설의 장면이 리그리에게서 도망친 캐시와 에멀린에게로 다시 옮겨진다. 둘은 조지 쉘비를 우연히 만나 대화하는 중에, 일라이자가 어릴 적 팔려갔던 캐시의 딸이고, 조지 해리스가 에멀린의 동생이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캐시와 에멀린은 조지 해리스와 일라이자를 찾아 캐나다로 건너간다. 재회한 그들 일행은 모두 함께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Liberia)로 이주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이제 이 소설의 교훈을 묵상해보자. 우린 주인공 톰을 다시 리뷰 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과연 톰이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 게 좋을까?

어떤 이는 착하기만 한 톰으로 인해 이 소설이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조로 흘러갔다고 비판한다. 인권운동의 측면에서도 오직 순종과 용서로 대변되는 톰의 캐릭터로는 흑인의 인권을 결코 보장받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의 눈으로 보면, 조지 해리스가 톰보다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백인에 맞서 싸우며, 가족을 데리고 자유의 땅을 찾아나서는 그의 적극성이야말로 롤 모델이 될 법하다.

그러나 한가지를 자문해보자. 작가 스토우 부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작품”이라고 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과연 이 소설의 메시지가 조지 해리스만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가정하여, 만약 세상이 뒤집혀 흑인노예들이 주인이 되고 백인이 노예가 된다면, 그곳에선 리그리 같이 추악한 괴물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사랑의 공동체란 인류의 궁극적 목표는 증오와 복수로 거머 쥘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 길로 가는 대열의 중심엔 톰이 있어야 한다. 톰의 사랑과 용서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폭압과 학정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톰은 기독교인이다. 늘 성경을 읽으며 예수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신실한 신앙인의 캐릭터다. 톰은 노예상인에게 팔려갈 때에도,“자기가 하는 짓이 나쁜 일인 것조차 모르는 저 해일리가 불쌍할 뿐이오. 우린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오”라고 말했을 정도다.

톰은 예수님이 그러셨듯,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순종의 모습이다. 매를 맞아 죽어갈 땐 사악한 주인 리그리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마치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또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죽었던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처럼.

이러한 용서가 단지 소설이나 성경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너도나도 복수, 복수하며 서슬 퍼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 기도문이 마음을 울린다.

나치 독일에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라는 유대인 수용소가 있었다. 이곳엔 주로 여성들이 수용되어 있었단다. 어느 날 거기서, 죽은 아이의 시신 곁에 남겨진 쪽지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이의 기도문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의 용서를 비는 기도….

“주여, 선의를 가진 사람들 뿐아니라 악의를 가진 사람들까지 기억해 주소서. 그들이 저희에게 가한 고난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난으로 인해 저희가 맺은 열매도 기억하소서…. 그들이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로 인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뜻있는 자는 고민한다. 어떻게 역사를 바꿀 것인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예수를 닮고자 했던 한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이 노예제의 견고한 진을 허무는 기폭제가 되었다면, 우린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사랑과 용서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