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조나단, 너는 한 번 추방당한 과거가 있어. 옛날에 같이 생활했던 동료들이 지금에 와서 너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너는 이런 격언을 알고 있을 거야.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것. 그건 진실이야.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하늘을 보여주고 싶어 하다니!”
“설리번, 나는 반드시 돌아가야 해요.”

미국 작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가 1970년에 발표한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통상 ‘갈매기의 꿈’이라고 하면 1부의 내용을 주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2부에서 설리번이란 갈매기가 말하는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The gull sees farthest who flies highest).”는 위의 지문 속의 말을 따로 떼어내어 대표적인 명언으로 인용하곤 한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잘 알려진 1부의 내용이다.

주인공 갈매기의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이다. 그는 언제나 비행 연습을 한다. 조나단에겐 먹는 것보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단지 먹기 위한 비행을 거부한다. 비행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고 싶어 한다.

조나단은 하늘 높이 날아오른 후 한계 속도를 넘어 수직 하강을 시도한다. 실패하면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위험을 굳이 무릅쓴다. 마침내 성공하지만, 갈매기 무리의 우두머리는 그것이 분별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책망한다.

이에 조나단이 항변했다.“삶을 위한 의미를 찾고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감이 강한 갈매기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수천 년 동안 우린 물고기 머리 밖에 찾아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삶을 영위할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두머리는 조나단을 무리에서 추방해버린다. 소설은 2부, 3부로 넘어간다. (지면 관계상 둘을 합쳐 간추림)

어느 날 조나단이 두 마리의 찬란한 갈매기에게 이끌려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연장자 갈매기 치앙(Chiang)이 말했다. “천국이란 장소나 시간이 아니다. 천국은 완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치앙은 완벽한 속도에 다다르는 순간이 바로 천국에 닿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얼마 후 눈을 감고 해변에 서 있던 조나단은 문득 깨달음을 갖는다. “나는 아무런 장애도 없으며 능력의 한계를 갖지도 않은 완전한 갈매기다!” 조나단은 비로소 눈을 떴다. 치앙이 그를 격려한다. “나는 너처럼 배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은 갈매기를 만 년 동안 한 마리도 보지 못했어. 넌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될 거야.”

조나단은 추방당했던 무리에게로 돌아가서 자기가 터득한 진리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각의 속도(thought-speed)로 나는 법을 가르치는 선배 설리번(Sullivan)이 만류했다. 설리번은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육지로 돌아가지 말고 천국에서 높이 날기를 원하는 갈매기들을 도우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조나단은 결국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조나단은 플레처(Fletcher)라는 어린 갈매기를 만나고, 또 6명의 생도를 더 만나 그들과 함께 육지의 갈매기 무리로 되돌아간다.

어느 날 플레처가 고속비행을 시범으로 보여주다가 절벽에 부딪혀 거의 죽게 된다. 조나단이 플레처에게, 육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자 플레처가 되살아났다. 그 장면에 놀란 주위의 갈매기들이 소리쳤다. “그는 악마야! 우리 집단을 파괴시키러 왔을 뿐이야!”

그래도 조나단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플레처에게 갈매기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부탁하고 그는 떠난다. 자기를 신으로 받들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조나단의 몸이 점차 투명해지더니 어렴풋한 빛이 사라지고 공중으로 사라진다. 조나단이 떠난 후 플레처가 생도들을 가르친다. 속으로 “한계는 없다고 했죠, 조나단?” 하고 되 뇌이면서 플레처가 미소를 짓는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갈매기의 꿈’에서 1부는 서론에 불과하다. 정작 본론은 2,3부에 있다. 거기서 접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명상, 마인드 콘트롤, 초능력으로 특징되는 뉴에이지 색채 일색이다. 완전한 비행을 추구하는 갈매기들이 마치 인도 요가의 수도사처럼 느껴질 정도다.

‘갈매기의 꿈’에서 갈매기는 인간을 의인화하고 있다. 작품은 말한다. 우리의 자각, 명상, 수 없는 훈련을 통해 완전한 자유, 곧 천국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정반대다. 아담의 불순종 이래 인류는 죄 된 본성에 지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절망한다.

우리의 진짜 자유는 수 없는 훈련이 아니라, 죄인 된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삶을 천국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갈매기의 꿈’에서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가장 감동적인 모습은, 단지 먹기 위한 비행을 거부하고 더 높은 삶의 목적을 찾아나서는 조나단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왜 사는가? 왜 나는가? 그것이 조나단의 질문이었고 그는 그 대답을 찾아 나섰다. 그런 조나단을 책망하는 우두머리 갈매기에게 그가 항변했다. “삶을 위한 의미를 찾고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감이 강한 갈매기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 항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엔 모범생 교인들이 많다. 그들로선 규율과 전통을 지키는 것이 순종일 수 있겠지만, 자칫 지나칠 경우엔 더 깊은 주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일탈마저 위험시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수필가 피천득이 쓴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는 글이 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로 만든 연적(주: 먹을 가는데 필요한 물을 담는 그릇)이 하나 있었단다. 연꽃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는데, 그 중 하나만이 옆으로 약간 꼬부라져 있더란다. 이 균형 속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이라고 그는 썼다.

이단이야 말할 나위 없이 적이지만, 주님을 사모하는 파격이라면 이를 존중해줄 수 있는 수필 같은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조나단이 다다른 결론은 뉴에이지적이다. 소설을 읽되 예배자이길 원하는 우리로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나단이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에만은 우리도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사는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답은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1 문답을 인용하며 그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문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