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

허수아비가 말한다.
“난 짚으로 만들어져서 뇌가 없어. 그래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마법사 오즈에게 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양철 나무꾼이 말한다.
“마법사 오즈는 내 소원도 들어줄까? 난 따뜻한 마음이 담긴 심장을 갖고 싶어.”
사자가 속을 털어놓는다.
“나는 겁쟁이야. 용기를 갖는 게 소원이야. 마법사 오즈가 내 부탁도 들어줄까?”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는 미국의 동화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이 190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국 캔자스에 살던 도로시(Dorothy)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마법의 세계 오즈(the magical land of Oz)에 떨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펼치는 모험 이야기다.

도로시는 강아지 토토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에메랄드 시로 간다.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줄 거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도로시는 가는 길 위에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를 만난다.

위의 지문(주:발췌 후 편집)처럼, 그 셋에겐 각각 한가지씩 결핍이 있었다. 짚으로 만들어져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 용기가 없는 겁쟁이 사자. 그들 모두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면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단 희망을 품었다.

도로시 일행은 모험을 거쳐 에메랄드의 나라에 도착했다. 드디어 마법사 오즈를 만나지만, 그는 서쪽 나라의 나쁜 마녀를 죽이고 돌아와야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도리없이 서쪽 나라로 향한 도로시 일행은 마녀에게 모두 붙잡히고 만다. 서쪽 마녀는 도로시의 은 구두를 몹시 갖고 싶어 했다. 그 은 구두는 도로시의 집이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마법의 세계로 떨어질 때 그 밑에 깔려 죽은 동쪽 마녀의 것이었다. 서쪽 마녀가 은 구두를 빼앗으려 할 때 도로시가 양동이의 물을 마녀의 머리에 끼얹어 버리자 마녀가 물에 닿은 설탕처럼 녹아버린다.

서쪽 마녀를 죽이고 돌아왔는데도 오즈는 그들을 계속 피하기만 한다. 도로시 일행에게 그의 진짜 정체가 탄로난다. 오즈는 사실 마법사가 아니었다. 캔자스의 서커스단에서 기구를 타던 사람이었다. 기구가 바람에 떠밀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기구를 타고 내려오는 그를 에메랄드 사람들이 위대한 마법사로 떠받들자 그도 마법사인 양 행세해왔다.

도로시와 함께 캔자스로 돌아가기 위해 오즈는 열기구를 만든다. 그러나 도로시는 없어진 토토를 찾느라 타지 못하고 오즈 혼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도로시는 뒤늦게 자신의 은 구두에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된다. 뒤꿈치를 세 번 치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도로시가 토토와 함께 캔자스로 돌아가면서 동화는 끝이 난다.

이 동화의 가장 큰 교훈은 도로시 친구들의 결핍이 사실상 이미 그들 안에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허수아비는 원래 지혜로웠고, 양철 나무꾼은 원래 따뜻했으며, 사자는 원래 용감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낮은 자존감이 그 자질들을 억눌러왔다. 오즈는 그 사실을 간파했다. 재치를 발휘해 뇌와 심장과 용기를 이식해주었다. 허수아비의 머리엔 왕겨를, 양철 나무꾼에겐 톱밥을 가득 채운 비단 심장을, 사자에겐 용기가 솟는 음료를 주었다. 친구들은 비로소 그들의 숨겨진 자질을 회복한다.

많은 이들이 낮은 자존감에 시달린다. 둘러싼 주위 사람들도 툭하면 지적질을 해댄다. 너는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그러나 최대호 시인의 짧은 시‘나는’에서 처럼, 사실 난 괜찮은 것이다. 쉬어가도 될 만큼.

사람들은 이렇게 / 말 할지도 몰라 / 아직 부족하다고 / 더 노력해보자고 / 근데 나는 / 이렇게 말 해주고 싶어 / 정말 잘 하고 있다고 / 괜찮으니 쉬어가자고

성경의 기드온도 그랬다. 그는 겁쟁이였다. 약탈자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좁은 포도주틀에 몰래 숨어서 밀을 타작했다(사사기 6:11). 그런 기드온을 여호와의 사자는‘큰 용사’라고 불렀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신다고도 했다. 새로운 정체성에 기드온이 변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그는 단 300명의 용사로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다.

동화에선 이 일을 오즈가 해냈다. 허수아비의 왕겨, 양철 나무꾼의 톱밥 심장, 사자의 음료수는 기드온의 가슴을 울린 ‘큰 용사’의 동화적 표현이다. ‘오즈의 마법사’란 전혀 거룩하지 않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동화 속엔 변장 된(in disguise) 사사 기드온이 들어있다.

우린 어린 소녀 도로시의 모습에서도 영적 교훈을 발견한다. 도로시는 온갖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은 구두의 뒷굽을 쳐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그 무엇도 도로시의 마음을 주저앉힐 수 없었다. 이러한 도로시의 모습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이란 교리를 떠오르게 한다.

신앙의 여정에서 성도는 거센 환난과 유혹을 만난다. 그러나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예수를 참되게 믿는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참고 이겨내 본향에 이를 것이다.

마법사 오즈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반면교사 역할도 한다. 오즈는 자신을 위대한 마법사로 떠받드는 에메랄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뿌리치지 못해 정체를 숨겨왔다. 그러나 사도행전 14장은 전혀 다른 스토리를 전해준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였다.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자 무리가 그들을 신이라 부르며 제사드리려 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외쳤다.

오즈도 그랬어야 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nothing)을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 말자. 내 발이 바닥 점에 닿을 때에야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도로시의 친구들에겐 소망이 있었다.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 모두 그들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 성경은 약속한다.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서 5:5).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는 이미 그들 속에 기도의 응답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소망하지 않았다면 그 응답은 언제까지나 묻혀만 있었을 것이다.

동화 초반에 친구들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딱한 처지였다. 그러던 그들이 소망을 통해 동화의 종반에 이르러 놀랍게 변신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리더의 자리로까지 나아간다. 허수아비는 오즈가 떠난 뒤의 에메랄드 나라를, 양철 나무꾼은 서쪽 나라를, 사자는 숲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

이 교훈은 복음의 현장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임해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디모데전서 2:4).”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로마서 8:24)라고도 말씀한다.

삶을 바꾸고 싶은가? 구원을 목말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라. 우리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질 것이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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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