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이요? 난 주님이면 족합니다”

“어휴, 수염 좀 깎지 그게 뭐예요 산적같이?”

유난히 수염 기르는 걸 싫어하는 나는
독감을 된통 앓으며 면도하지 않는 남편을 보며
‘감기 좀 나아지면 면도하겠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히 일어나서도 면도하지 않는 남편이
몹시 못마땅합니다.

“면도 좀 해요. 내가 그리 싫어하는 줄 알면서.
이제 나이가 들어 간이 밖으로 나오긴 했나 보네.
아내 말도 듣지 않는 거 보니까.”

묵묵…
못 들은 척…
아직도 아픈 척…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건지
요지부동 면도할 생각을 통 안 합니다.
아마도 내가 글래디에이터의 수염 기른 주인공을
아주 좋아하는 그 영향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이들까지 아빠 편을 들고 나섭니다.

“아빠, 이 사진 좀 보셔요. 이 사람 멋있죠?
아빠도 이렇게 길러 보세요. 그럼 멋있을 거 같아요.”

핸드폰에서 수염 기른 멋진 남자들을 찾아 보여주면서
아빠를 부추기는 얄미운 딸내미!

“아빠 그레이 머리 색깔하고 수염 색깔이 같아서
아주 중후해 보이면서 아주 잘 어울리고 멋져요.”

아빠의 머리 색깔, 수염 색깔까지 응원하며
‘아빠 수염 기른다’에 힘을 보태는 아들놈!

무슨 얼어 죽을 중후? 멋?
덩치나 작으면 또 몰라.
덩치는 북극곰 만해 가지고
희끗희끗 수염까지 기르고 있으니
금방 산속에서 몽둥이 들고 뛰쳐 나온
딱, 산적 포스구만…

수염을 기르고 나가자 사람들의 반응은
참 여러 가지 입니다.
여자들이 거의 하는 말!
“멋있긴 한데요… 내 남편이라면 쫌……”

어휴, 쪽 팔려!
딱, 이 소리 아닙니까?

“내 남편이라면 이렇게 수염 기르게 하지 않을 거예요”

남자들이 거의 하는 말!
“어휴, 아주 멋지게 잘 어울리시네요.”

멋지게 잘 어울린다고요?
에휴, 똑바로 보고 진심으로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소리에도 묵묵…
저 소리에도 묵묵…
나는 내 길을 가겠노라…

어느 날 아침, 면도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드디어 면도하는가 싶어 살짝 가 보았습니다.

에구머니나!
내 립스틱을 가져다가 그렸는지
수염 길 따라 주황색으로 벌겋게 그려놓고
수염 길 밖으로는 면도하고
수염 길 안으로는 정성스레 수염을 다듬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싫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들이든 딸이든 한 명이라도 내 편에 있다면
2대 2로 힘껏 밀어 붙여보겠는데
3대 1으로 이기고 가는 게임인데 난들 어찌하겠습니까?

마음을 비웠습니다.
제멋에 산다는데 우짜겠습니까?
삼손처럼 머리 길게 기르겠다고 안하는 것만도 감사하죠.

점점 머리도 하얗고
점점 수염도 하얘지면
그땐 난 산신령하고 사는 거여요, 그럼?

주여, 나는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하옵니다.
다른 신은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주님도 버겁습니다.
주여, 통촉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