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학교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처음 하는 일은 긴장하고, 염려한다. 그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조바심에 일을 그르치기가 쉽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신뢰하는 대상을 찾는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처음 설교하던 날
신학교 다닐 때, 학생회 전도사님이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설교하는 대상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었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 중에는 동료들인 청년들도 있었고,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들도 있었다.

설교문을 작성했다. 긴장하지 않기 위해, 작성한 설교문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교 내용을 외우다 한 문장을 잊으면 당황해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토요일이 되었는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 근처에 산이 있었는데 주일 이른 아침, 산에 올라 외운 설교를 몇 번이고 연습했다. 전날 잠도 설치고, 외운다고 외운 설교 내용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강대상이 올랐다.

설교를 잘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첫 설교를 마쳤다. 어떻게 설교를 했는지, 내용을 잘 전달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 동료 교사들이 잘했다고 격려해 주었지만, 그 격려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느꼈기에 주님의 도움만을 간절하게 구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출애굽과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은 나의 첫 설교처럼 낯선 여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중 그 누구도 광야를 경험해 본 사람이 없었다.

광야를 안다 해도 지낼 곳을 미리 정한 그 지역 근처였지, 아무런 연고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구름을 따라 가야 했던 이 여정에 익숙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왜 지중해변의 좋은 길 대신 광야를 선택한 것일까?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중해변의 좋은 길을 따라가다 블레셋 사람들이 나와 위협하면 두려워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출애굽기13:17).

그러나 광야에서 아말렉족속과 미디안 사람들, 요단강 동편에 살던 사람들과 전쟁해서 승리했기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면 승리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표면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갈까 봐 광야를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으로 삼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광야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었다(출애굽기6:7).”

하나님은 광야 여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리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훈련장소로 광야를 선택하셨다. 광야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이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선 물과 식량이 필요한데, 광야에선 이런 것들을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땅은 넓지만 아무도 살지 못한다. 광야에서 생존을 위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인생의 광야
목회하다 보면 종종 이런 광야를 만날 때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절망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성도들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낙담해서 위로하려고 심방을 갔는데 도리어 관계가 더 나빠져 돌아올 때가 있다.

학생들이 원하는 진로대로 가지 못해 괴로워하는 데 도와줄 방법이 없다. 무심코 한 말에 상처를 받은 교인을 찾아가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마음의 서운함을 바꾸지 않으면 나의 무능함에 절망하게 된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한 목사님이 은퇴하시게 되었다. 목사님 사역하는 교회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담소를 나누다가, 한가지 질문을 했다.

“목사님, 지금까지 목회하시면서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겨 내셨습니까?” 목사님이 지긋하게 웃으시더니, “김 목사 나를 따라오겠나?”라고 말씀하시며 교회 강대상으로 나를 이끄셨다. 오래된 교회라 강대상이 나무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목사님은 나무바닥의 색 바랜 한 곳을 가리켰다. “난 이곳에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를 견디었다네! 목회에 노하우가 어디 있겠나? 주님 바라보고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지!”

광야는 마룻바닥 같은 곳이다. 그곳은 나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장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광야이며,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는 나의 민 낯을 드러내게 하며, 내가 그동안 우아하게 쓰고 있던 마스크를 거칠게 벗겨낸다. 그동안 어깨에 힘주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 하고, 내가 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발가벗기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를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그 누가, 광야에 있기를 좋아하며, 그곳에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나도 광야를 가는 것이 싫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내가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광야를 향해 간 것이 아닌데,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시간을 잊은 것이다. 이젠 설교도, 목회도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예전처럼 주님을 찾지 않을 때마다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광야로 되돌아온다.

광야학교 졸업식
어떻게 하면 광야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학교를 40년 만에 졸업했는데 난 얼마나 걸릴까?

세상의 학교에는 졸업이 있다. 아무리 힘든 과정이라고 해도, 일정한 학점을 이수하면 졸업하게 해준다. 좋은 점수를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진학하고 졸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만 넘으면 졸업을 허락한다.

그런데 광야학교에는 이런 아량이 없다. 광야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이수학점이나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것은 온전하게 고백하지 못하면 졸업이 안된다.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광야로 돌아올 때마다 당황한다. 난 아직도 졸업하지 못했던 것이었나?

그래도 이 광야학교가 낯설지 않다. 저기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주님도 함께 계셨다. 버려진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그곳에서 다음 과목 수업을 준비하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