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산과 로뎀나무, 그리고 호렙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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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양무리를 목양하는 고상하고 높은 가치의 사역이지만 여기에도 ‘성공’이라는 단어가 붙어 다닌다. 그 성공의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 똑같다. 하나님의 종인 목사 역시 성공주의 목회 신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개척한 지 10년 만인 2015년 5월, 하나님께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여러 사람들이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넸는데 그 말에 나는 ‘내가 축하 받을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셨고 교인들이 헌신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홀로 싸워 바알 선지자들을 이겼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이세벨> 왕후의 반격에 정신 없이 도망쳤다. 나 역시 입당의 기쁨은 잠깐이고 낮추심의 섭리 아래 모든 목회적 상황들이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목회에서 가장 큰 능력은 인내와 기다림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하실뿐만 아니라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는 중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짜 교회이기 때문이다.

서양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설교 중에 회중을 향해 자신의 어떤 약함을 고백하면 회중들은 목사의 약함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위로하고, 함께 짐을 짊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의식 밑바탕에 흐르는 문화는 사뭇 다르다.

서양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보면서도 담임목사가 약함을 고백하면 가볍게 여긴다. 그리고 계속 달리라고, 약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유무형의 채찍질을 가한다. 쓰러지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일으키기보다는 무관심과 냉대의 화살을 쏘아댄다. 평신도들이 오해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목사의 눈으로 본 목회의 현실이다. 목사들은 계속 강해지려고 하고 교회와 교인들 앞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탈진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위로나 동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품는 것만큼 교인들도 단 십분의 일이라도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를 품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민교회 교인들은 외국이라는 특수성을 활용하는 지악(至惡)스러움이 있다. 개인적 또는 집단적 편리에 따라서 한국적 신앙 방식과 키위 스타일의 신앙 방식을 기술적으로 교합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목사에게는 슈퍼맨의 능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목사는 만능이 아니기에 다 할 수도 없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목회자들처럼 밤낮없이 헌신하고 숨 한 번 돌리지 못하고 달리는 사역자들은 흔치 않다고 본다. 성실하지 않은 목회자들은 설 곳이 없기도 하지만 죽도록 달리는 것을 본래 사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는 철인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지친 말을 버리고 새 말로 바꿔 타듯이 목사를 바꾸는 쉬운 길을 택하려 한다. 단순히 ‘목사에게 잘해라. 잘 섬겨라. 대접하라’는 유치한 얘기가 아니다. 게으름부리지 않고 달려온 목회자가 숨 가빠할 때 옆에서 함께 호흡을 고르고, 함께 웃어주고, 손을 내밀어주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목회적 비전과 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목사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네 목사들은 우리 나름대로 목회적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한 열정을 훈련 받아야 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쫓기듯이 내려와 절망의 로뎀나무까지 갈 동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려갈 때는 더 내려갈 수 없을 때까지 내려가야만 한다. 중간에는 치고 올라올 수 있는 디딤돌이 없기 때문이다. 바닥을 쳐야만 그 반 탄력으로 위를 향해 오를 수 있다. 더 정확한 것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고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때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동안 누구도 힘이 되지 않고 돕지도 않는다. 여기에 외롭고 힘들지라도 목사 된 자로서 홀로 싸워야 할 자신만의 오롯한 싸움이 있는 것이다. 외마디 비명과 원망이 터져 나올 때 쓴 내를 집어 삼킴과 내뱉음을 반복할지라도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살을 꼬집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다시 깎으시고 빚으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목회의 바닥이라 할 수 있는 로뎀나무를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목회를 아직 모르는 것이다. 바닥은 낯설고 원치 않는 자리다. 그 바닥의 낯섦이 계속될 때 믿음과 소망은 점점 줄어들고 어둡고 차가운 현실의 바닥만이 자꾸 낯익게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가슴을 치며 바닥을 치며 “하나님이여, 언제까지입니까?”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이것이 목회의 진짜 민낯이다.

자식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자주 오고 가는지 다 모른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로뎀나무 밑에 얼마나 자주 왔다 가는지 모른다. 알아도 모른척하기도 한다. 목회가 결코 낭만이 아니며 처절한 실전이라는 사실은 체득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목회에 대해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본인이 직접 겪기 전에는 전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목회의 냉엄한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목사는 비로소 목사가 되어간다.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았을 때 인간적이 될 것인지 아니면 호렙산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영적 패배감, 현실적 당혹감으로 인해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서 별 말을 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교통, 즉 기도가 끊어져서는 안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도 보내주시고, 떡과 물도 공급해주시고 마침내 호렙산까지 인도해주심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갈멜산에서 로뎀나무로 그리고 호렙산까지 가는 길을 목회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눈물은 아꼈다가 하나님 앞에서 흘려야 한다. 사람과 싸우면서 진을 빼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고 영육 간에 부흥이 임하게 된다.

여러분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가 만약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앉아 있다면 그는 지금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인간적인 동정은 하지 말고 목회자가 하나님 중심으로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곁에 함께 서 주고 목회적 일상에 함께 동행하기를 바란다.

목사가 쓰러지면 좋아할 것은 마귀밖에 없다. 목사는 교인들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그러나 교인들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칠천 명 중 한 사람임을 표현할 때 그것만으로도 여러분 교회의 목회자는 다시 한 번 일어설 힘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