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교인이 소개해 준 집에서 살았을 때의 일이다. 렌트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정원이 너무 망가져 있어서, 아내가 정원을 보기 좋게 다듬겠다고 집주인에게 부탁을 했다.
그분의 동의로 정원을 손보기 시작했고, 비교적 손이 덜 가도 되는 선인장 종류의 꽃들을 심었다. 자동 급수 장치까지 갖추었으니 돌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 6개월은 정성껏 돌보았다.
우드 칩과 돌을 촘촘히 정원에 깔았기 때문에 잡초가 쉽게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인한 잡초는 정원 곳곳에서 싹을 틔우고 올라왔다. 정기적으로 정원을 돌봤기에 잡초는 번식하지 못했다.
한 1년이 지나자 정원관리가 귀찮아졌다. 그런 상태로 반년이 지나자 정원은 잡초로 뒤덮였다. 아내가 잡초를 뽑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몇 개월을 외면했다.
잡초더미에서 발견한 거룩함
어느 날 아내는 더 참을 수 없었는지,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잡초를 정리하기 전엔 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장비를 갖추고 잡초로 우거진 정원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1년 이상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원에 심어진 선인장과의 꽃들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나 예쁜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잡초의 왕성한 번식 속에서도 꽃들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기대하지 못했던 꽃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잘라낸다’, ‘분리하다’라는 의미의 ‘코데쉬’라는 히브리어가 생각났다. 무엇을 잘라내고, 무엇을 분리하라는 것일까?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잡초였다. 잡초가 선인장과의 꽃들을 가리고 있어서 꽃들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잡초를 걷어내자, 그 안의 아름다웠던 꽃들이 존재했다.
거룩함과 더하기
나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 말도 점잖게 하고, 옷차림새도 깔끔하게 유지하고, 외모도 신경을 썼다. 그러나 거룩함은 여전히 나에게 낯설었다.
시간을 따라 하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았다.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삶이 나에게 선한 도전과 깨우침을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말랐다.
거룩함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이다
정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잡초와 공생하면 그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것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잡초더미들은 거룩함은 비움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화단의 잡초를 날마다 걷어내는 것처럼, 내 안으로 잡초처럼 파고드는 죄 된 본성(sinful nature)을 살피고, 날마다 주의 보혈로 그것을 뽑아내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라 잡초는 말해 주었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뽑아내던 잡초는 곧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안내자로 변했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잡초는 나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뉴질랜드 어디를 가도 잡초가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누가 돌보아주지 않아도, 물을 주지 않아도, 거친 환경에서도 끝까지 버텨낸다. 심지어 바닷가 모래톱에서도 살아남는다.
잡초의 강인한 생명력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내 안의 죄 된 본성이다. 잡초는 보이기 때문에 뽑아낼 수 있지만, 경건으로 위장된 나의 죄 된 본성은 드러나지도 않는다.
날마다 죽노라
잔디밭을 뒤덮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잡초제거제를 뿌렸다. 잔디는 남겨두고 잡초만 죽이는 신기한 스프레이이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 많던 잡초가 시들시들해지더니 곧 누렇게 변했다. 이제 잔디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잔디밭 한 모퉁이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던 마른 땅이 조금 있었는데, 그곳에서 잡초가 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투리땅을 잡초로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에서 죄 된 본성을 없애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여전히 옹졸하고, 불평하는 나를 마주하곤 한다. 잡초는 그 씨앗이 자라는 것이 보이지만, 내 마음에서 자라나는 죄 된 본성은 보이지도 않는다.
날마다 내 안에 잡초가 자라고 있는지 살피지만, 그런 긴장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다. 주의 말씀과 교훈이 떠나면 나의 경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너희가 내 안의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죄 된 본성을 잘라내는 능력은 나에게 있지 않았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remain), 죄 된 본성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다.
두 번의 마이너스가 반복되어 곱해지면 그 기호가 플러스로 바뀌듯, 내 안의 죄를 버리고, 그 죄를 품고 있는 나(ego)를 버리면, 예수님이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뜻이었다.
앞마당 잔디밭에 어느새 또 민들레가 자라났다. 민들레 뿌리를 살살 뽑아내는데, 중간에서 ‘뚝’하는 소리가 나며 부러졌다. 외견상 민들레는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민들레가 자라날 것이다.
내 안에 남아있는 죄 된 뿌리, 그 본성을 보고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나 보다. 바울의 탄식이 바람처럼 귓가를 울리며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