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또 다른 삶의 시작

이민 연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자로서 이민사회를 논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민선배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 명의 관찰자로 뉴질랜드 이민사회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눠보려고 한다.

뉴질랜드 이민사회는 좁다. 한 다리를 건너면 거의 모든 사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을 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말을 듣는 것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함부로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이 어쩌면 이민사회 속에서는 기쁨은 나누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슬픔은 나누면 평생 흉을 잡힐 위험이 있다.

말로 관계가 회복되기도 하고 말로 관계가 파괴되기도 한다. 말이 말을 낳고 그 말이 또 다른 말을 낳아 원래 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따라서 들은 말을 다른 곳에 전하지 않기만 해도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이 이민사회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그냥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이 나중에 보면 후회가 남지 않는 지혜로운 길이다.

사랑하는 자녀가 청년이 되어 배우자를 만날 나이가 되었을 때, 배우자를 찾기도 어려운 곳이 이민사회다. 이민사회의 역사가 그리 좁지 않기에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알기에, 나의 귀한 자녀에 어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배우자를 찾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Intermarrige 커플들도 많다. 단지 한국인 배우자 혹은 외국인 배우자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민 2세대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본토 한국인과의 결혼도 Intermarriage 커플들의 문화충격만큼이나 그 차이가 엄청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는 가정이 많이 생기고 있다. 필자 역시도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내 자녀가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혹은 본토 한국인과 결혼을 하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자녀 때문에 이민 왔지만 자녀가 학교를 다니며 점점 뉴질랜드화 되는 반면에, 오늘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며 가족을 부양하는 부모간 서로의 소통이 점점 소원해지고 마지막에는 단절되는 경우도 있다. 비단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이고 다른 정체성 간의 충돌이 문제다.

이민을 선택함으로써 부부간의 관계 속에서도 도전이 찾아온다. 한국과 뉴질랜드의 삶의 방식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배우자 간에 그 동안 서로에게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을 보게 되고 그 다름이 부부관계에 활력소를 주기도 하지만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한국에서 부부싸움을 했던 원인과 뉴질랜드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원인이 다르고, 화를 표출하고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리고 화해를 하는 다양한 팁들도 건강한 부부관계에 도움을 준다.

이민자의 나라이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이민사회다. 그런 이민사회 속에서 한국의‘정’문화를 기대하고 행동한다면 실수를 범하기 쉽다.

갑자기 친해지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관계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천천히 예의를 지키며 배려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가운데 깊어지고 튼튼해 진다.

묻지 않는 질문에 답하고 구하지 않는 도움을 주는 것이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처음 이민을 온 이민자가 현실을 파악하고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바람을 직접 맞을 수 있게 놔두는 것이 어쩌면 어줍잖은 도움보다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같은 한국인이라 해서 마음의 문을 쉽게 여는 것은 서로간에 위험하다. 우리가 외국인을 만날 때에 아무 기대 없이 예의와 배려로 만나 듯, 타국 땅에서 한국인을 만났지만 엄연히 뉴질랜드에 사는 외국인이기에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뉴질랜드에 가족이나 친구를 보러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다. 친구가 오랜만에 왔는데 가족이나 친지들이 처음으로 뉴질랜드에 방문했는데 잘 해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손님이 온다고 해서 렌트비를 내지 않아도 되거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살아내야 하고 일은 나가야 한다.

그런 삶을 잠시 멈추고 친구와 가족과 친지를 데리고 하루를 바닷가에 데려간다면, 이런 좋은 곳에서 살아서 좋겠다라는 말과 함께, 오늘 하루를 이렇게 함께 해준 뉴질랜드 이민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기름값 $50이라도 찔러 넣어주는 것이 예의와 배려라고 생각한다.

각 가족마다 가풍이 있고 문화가 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 성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 서로 다른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도 서로를 알아가는데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가 있기에 결혼세미나나 부부강좌를 듣는다.

20년 이상을 한국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연구와 공부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와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해야 하며 함께 나누고 함께 검증하고 토론하며 서로 배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방식으로 한다라는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민사회는 변화를 이루기 어렵고 발전할 기회를 잡기는 더욱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살 때는 많은 이들이 걸어간 발자국의 흔적들이 많이 있기에 누군가의 성공, 실패 그리고 시행착오를 들을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다.

그래서 삶이라는 도화지에 누군가의 밑그림을 가져와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이 고친 그림을 보고 나도 그런 식으로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민은 전혀 다르게 그 밑그림을 이민자 스스로 그려 나가야 한다. 내가 그린 그림이 옳은 것인지 지금 잘 그려나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쳐야 하는지에 대해 중간평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객관적인 시각을 얻기도 참 어려운 삶이 이민의 삶이다.

또한 각 이민자의 정착 과정과 삶이 너무 드라마틱하고 독특하기에 바로 내 것으로 삼고 적용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번 연재 글들을 통해 이런 밑그림들도 있다라는 것을 필자의 경험과 다른 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개하고, 내가 그렸고 그리고 앞으로 그릴 밑그림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섬기고 싶은 것이 필자의 소망이다.

필자도 이민초기에 누군가가 해 준 한마디의 정보와 밑그림으로 오늘의 모습으로 뉴질랜드에 정착할 수 있었기에 도움을 받은 자로서 작은 경험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