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절대 공간이 있음을 스스로 시인하면서 내 삶에 모셔 들이고 난 후, 매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열심히 살다 보니 벌써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돌아보니 정직한 질문이 생겼다. 정말 하나님 그분을 위하여 살았는가? 그냥 무조건 꽝꽝 믿던 그 하나님 말고 실질적인 분임을 체감하면서부터 말이다
히브리어 하야= I was, 호베=I am, 이에=I will.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시간에 늘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 앞에서 과연 전심으로 온 맘을 다하여 순종의 자리에 있었는가? (히브리어를 쓸 수 없어 발음을 표시함을 양해 바랍니다.)
이미 시간을 끝내 놓으시고 시간 밖 거기 계시는 분. 그분께서 지금 현재 나와 함께 계시면서 하시는 질문 앞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인가
그냥 하나님의 이미지를 따라 만든 존재 말고 나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인가? (창세기1;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물에서 땅이 나오고 그 땅의 흙(히, 아파르)으로 빚어 사람을 만들어 호흡을 불어넣어 아담(사람)이라 부르시면서 너는 먼지, 흙임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만드신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길 바라셨다. 그의 형상(쩰렘)은 히브리어 짜드=의, 라메드=막대기 훈련,맴=물, 뜻 언어로 이루어졌다.
그런즉 그의 의가 막대기가 되어 사람을 훈련하여 공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는 존재라는 이 사실 앞에 무한히 고민하게 됐다. 하나님의 의가 막대기가 되어 훈련 받는 하나님의 형상인가에 대한, 그것을 전하고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
너무도 많은 시간 하나님의 의의 막대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이 대면서 다른 이를 훈련 시키며 하나님께서 알아보지도 못할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나?
모양(히;데무트) 인간을 아니 나를 바라보시면서 말로서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시면서 기대하는 바가 있으셨을 텐데 말이다. 살리는 영으로서의 영성 그것 말이다.
갈망이 생겼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고 싶은……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모습, 그 분과 같은 모습 말이다. 적어도 내 부족함 내 죄인 됨의 모습을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의의 막대기가 인간에게가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들이대어져서 자신의 법을 만족 시켜야 했던 그분의 분노와 십자가를 통한 긍휼과 사랑. 주면 받아야 하고 심으면 거둬야 하는 계산과 숫자에 능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그것은 뼈에 사무치다 못해 내 생명을 초개 같이 버릴 수 있을 만큼의 그 깊고 깊은 감동의 물결을 타고 싶다는 갈망이다.
어느 날 꿈속에서 예수 믿는다고 화형을 당하는 무리 속에 있었다.
점점 불길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할 때의 상황이 생각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의로 만족이 안되시어 채찍을 들고 심판대에 나를 세웠다고 가정해보는 것 조차 힘든 이유는 그 꿈에서 느낀 어려운 상황 때문일 게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심판의 자리를 피하게 했다는 감격된 사실로 인하여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성경을 충실히 전달하고 싶은 게 목표였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해하는데 7년이 걸렸었다.
목사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한히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어느 날, 청년 아이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닮고 싶은 사람, 흉내 내 따르고 싶은 기독교인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사과를 했다. 그냥 미안하다고. 이 시대의 목사 된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훌륭한 분들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지식은 풍부한데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부끄러운 일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그 청년이 질문했다. 그 많은 기도가 물질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냐고? 그 뜨거운 열심으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세상이 추구하는 그것들을 얻어 내기 위한 것이었냐는 질문에 이 상처 당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어설픈 변명을 했다. 이 후 다음 세대를 위한 더 심각한 기도 제목이 생겼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영접자는 호적과 삶의 법이 분명히 바뀐 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상, 나의 고집과 편견으로‘고르반’을 외치면서 부모공경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신 말씀처럼.
본인의 신념이 법이 되어 살면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즈음 어쩌면 당연시 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내 공로가 인정되어야 하므로 너 죽이고 나 살아야겠다는 식의 태도를 그 청년이 보고 느껴 말한 것이라면 더 할 말이 없다.
분명 “나 죽을 테니 너 살아라”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섬김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 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 고백한다! 그리고 회개한다! 이 세상에서 업적을 남기고 싶어 내 이름을 내고자 했던 니므롯의 영성을 버리겠노라고.
하나님의 메신저가 둔갑하여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것 인양 분을 냄으로써 하나님 영광을 취하던 모세처럼 되지 않겠노라고.
내게 주신 장자권을 가벼이 여겨 팔아 넘겨 믿음의 조상의 계보에 들지 못한 에서처럼 되지 않겠노라고(창세기25; 34).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품지 못하여 언약관계의 특권을 사단에게 내어 준 아담과 이브처럼 되지 않겠노라고.(누가복음4;6)
갖고 싶다! 다음 세대들에게 들려 줄 많은 믿음의 이야기들을. 내가 죽고 하나님 영광 받으신 이야기들을. 나의 연약함을 사용 하셨던, 하나님이 이기셨던 많은 이야기 들을 갖고 싶다. 2019년을 선물로 받았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힘에 따르는 책임이 무엇일까
자녀 된 권세자는“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누가복음 10; 19)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알아 볼 수 조차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 모습이 어떠한가의 문제이다. 마지막 그 어느 날 완성 될 주님의 날 그 발을 씻기는 영광스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그 분이 편안히 거하시는 집이 되고 싶고, 그 분의 의지를 심으시면 많은 열매를 내어드리는 밭이 되고 싶고, 믿음직스러워 그 분의 계획을 나누고 싶은 동역자가 되고 싶다. (고린도전서 3; 9) 하나님 식의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 사탄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지켜내는 어른이 되고 싶다.
하나님의 의가 나를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내 안에 흐르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축복의 통로가 되어 살리는 사람으로서, 완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으로, 나의 감정이나 경험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닌 그 분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으로 또 내일을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