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ANZAC DAY

인간의 야망으로 일어난 2차 세계대전 임영길 사관<구세군 오클랜드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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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 ANZAC군 참여
2차 세계대전의 발단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인한 독일의 붕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혼란,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 대한 불안 등 매우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세계 대공황에 따른 경제 위기로 부상한 파시즘과 이에 따른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독일의 반발 및 일본의 보상심리 등을 원인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절대로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될 비극이다.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6년 1일간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나치 독일, 일본 제국, 파시스트 이탈리아)이 일으킨 연합국과의 사이의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시작된 세계대전이자, 가장 참혹했던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

결과는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서 식민제국들은 몰락 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대두되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유엔이 창설되었다. 그 피해 또한 엄청났다.

뉴질랜드는 1939년 9월 3일에 본국(영국) 정부의 전쟁 수행에 합류 함으로써 크레타전투(1941-1945)에 참여해 역시 많은 상처를 안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뉴질랜드군 피해는 다음과 같다.

참전 7,700명 전사 671명 부상 1,455명 포로 1,692명

연합군은 크레타전투에서 42,700명이 참전해서 4,116명이 전사하고 독일군은 22,700명이 참전해서 3,988명이 전사 했지만 항공기를 220대나 잃었다.

오는 9월 2일이면 세계 2차 대전이 종전한지 73주년이 되는데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볼프 슈나이더가 말한 것처럼 저들은 영웅이자 희생자였으며, 또 지구상에서 누구보다도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더 이상 어리석은 전쟁은 멈춰져야 한다.

그리스 크레타 섬 전투
“전쟁에는 영웅이 없고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인류가 전쟁을 없애지 않는다면 전쟁이 인류를 없앨 것이다’라는 존. F. 케네디의 말처럼 1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인간의 야망은 또 한번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또다시 앗아갔다.


크레타 섬 뉴질랜드군의 프라이버그 사단장

ANZAC군 기념비가 세워진 곳
뉴질랜드 군은 세계평화수호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 현장을 찾아서 도착한 곳은 그리스 중부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테르모필레라는 조그만 면 단위 정도의 타운을 조금 지나 데살로니카 가는 방향 도로 갓길에 위치한 곳에 레오디나스 왕의 청동상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일찍이 주전 481년에 그리스의 레오디나스 왕이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영화 300의 스토리)과 노예병 7,000명으로 200만명이 넘는 페르시아 군대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곳이다.


ANZAC기념비를 일행들과 둘러보다

그래서 이곳에는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꼭 들렸다 가는 곳이다. 그러나 ANZAC군 기념비는 이곳에서 50여미터 떨어진 곳에 1미터 정도의 크기로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찾는 이도 거의 없다. 물론 이곳이 뉴질랜드 군의 주격전지는 아니다.

크레타 섬의 전투
ANZAC 연합군의 주 격전지는 크레타 섬이다. 그 당시 이곳은 바다였고 지형상 1차적으로 독일군을 막다가 후퇴했던 곳이고 인간의 야망으로 시작된 어리석은 전투였다.

이탈리아의 쓸데없는 야망 때문에 벌어진 최악의 섬 전투이기도 한 크레타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그리스 침공의 마무리를 위해 동 지중해 최대의 섬 크레타를 점령하기 위해 펼쳐진 독일 공수부대 최후의 공수작전으로 시작 되었다.

사실 독일로서는 그리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크레타 섬을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리스 전선 자체가 이탈리아와 베니토 무솔리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성되어 강제로 끌려간 측면이 컸고, 안 그래도 독소전쟁의 준비로 시간과 병력이 빠듯한 상황에서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를 상대하며 크레타 섬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는 크레타 섬을 계속 연합군이 장악할 경우 동 지중해의 불침항모가 될 것을 우려했다.

크레타 섬에서 발진하는 영국 폭격기들이 발칸 지역, 특히 독일이 애지중지하는 주축동맹국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를 폭격한다면 독일의 석유수급능력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과 동시에 북아프리카 전역에 보내야 하는 안전한 보급선도 필요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어떻게든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했다.

사실 영국군도 굳이 크레타 섬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영국군 수뇌부 입장에선 그리스 본토에서 발진하는 독일 공군기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독일 전투기들, 특히 Bf109는 영국 본토 항공전 때와 달리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여서 크레타 섬에서의 공중전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영국도 이제야 본토 방공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정도의 공군력 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국으로선 본토 항공전과 달리 사력을 다해 독일 공군과 한판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성가신 이탈리아 해군을 타란토 공습으로 침묵시켰다지만, Ju87이 돌아다니는 해역을 수상함대로 어슬렁거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아무리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라도 제공권을 잃어버리면 독일 공군의 밥이 될 뿐이었다. 여기에 영국 그리스 원정군도 크레타에서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길 강력 희망하고 있었다.

이는 동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개시, 리비아 대부분을 뺏기고 토브룩을 간신히 사수하는 와중에서 반격을 위한 추가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와 똑같은 생각, 즉 크레타 섬을 어떻게든 유지하면 불침항모로 굴리면서 폭격기를 띄워 루마니아 플로에슈티 유전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잘만하면 이탈리아 본토나 남부 독일도 공격할 수 있겠지? 란 생각으로 크레타 섬 사수를 지시했다.

승리의 대가로 얻은 손실은 너무 커
독일군 최후의 마지막 공수부대 작전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얻은 결과는 너무 참혹한 것이었다.


어느 무명용사의 동상

크레타 섬을 3지역으로 나눠서(영국, 호주, 뉴질랜드 사령관에 뉴질랜드인 프라이버그) 수비한 군인은 25,000여명인데 반하여 그때까지 크레타에 낙하한 독일 공수부대는 단지 8,000뿐이었고 대부분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었던 입장이었다.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판으로 최고의 거점을 스스로 포기한 연합군 덕분에 그때까지 기진맥진하던 독일 공수부대의 잔여병력들은 이곳을 쉽게 점령하지만 승리의 대가로 얻은 손실은 너무 컸다.

그래서 그 뒤에 히틀러는 공수부대를 작전에 투입하지 않고 일반보병에 편입 시켰다고 한다.
이 섬에서는 1975년까지 시신이 발굴될 정도로 양쪽 다 피해가 컸던 것은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못한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불구덩이 인줄도 모르고 뛰어 들어가 몸을 태웠던 것이다.

문득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 보여준 ‘전쟁에는 영웅이 없다는 점과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