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ZAC Day 102주년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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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작 데이(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이하 ANZAC)는 세계 1차 대전 중인 1915년 4월 25일 영국연방국의 일원으로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이 터키의 보스포러스 해협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전투에 참전한 날을 기념하여 1916년 4월 25일 시작하여 2018년 4월 25일에 102번째를 맞이하는 전몰장병 추모식이다. 한국의 현충일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안작 데이는 뉴질랜드 군이 세계 1차, 2차 대전을 비롯하여 팔레스타인 전투와 한국전, 그리고 베트남전과 세계 분쟁지역에 계속해서 참전하면서 전사한 군인에 대한 추모의 의미와 가치를 더하게 됐다. 이 날을 맞이하여 뉴질랜드 전역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전쟁기념탑에 헌화하고 참전용사들의 거리행진도 함께 하고 있다.

안작 데이 주간에는 전몰군인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서 모금을 하게 된다.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빨간 양귀비꽃 모양의 조화를 가슴에 달아준다. 붉은 양귀비꽃은 갈리폴리 해안을 비롯하여 유럽의 전투가 치러지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빨간 양귀비꽃은 군인이 죽어가면서 흘린 피를 기억하는 상징으로 알려지게 됐다.

1920년부터는 전쟁 참전용사를 돕기 위한 모금을 하면서 붉은 양귀비꽃 모양의 조화를 만들어 달아주면서 전몰군인의 희생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참전군인 가족들은 전투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과 친척에게 안작 비스켓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안작 데이를 기념하여 다양한 레시피의 안작 데이 비스켓을 맛볼 수 있다. 이승현 발행인

터키 갈리폴리를 다녀와서

역사상 최악이라 불리는 갈리폴리 전투로 양측 5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내
인류 역사상 전쟁은 언제나 끔찍했으며 단 한 번도 자비로웠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권력자들의 욕심은 항상 피를 원했다. 터키 서부에 위치한 갈리폴리 반도에 가보니 온 산을 꽉 채운 묘지들이 수 많은 군인들이 희생당하는 최악의 전투가 펼쳐 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갈리폴리 전쟁기념관 앞에서

처칠의 무모함으로 시작된 전쟁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어느 날, 젊은 나이에 해군성 장관에 임명된 처칠은 연합국인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로 확보에 관해 고민을 하다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발견하고, 이곳을 통과하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까지 곧장 진격할 수 있는 데다 흑해를 통해 러시아로 손쉽게 보급품들을 수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큰 공적을 쌓기 만을 바라던 처칠은 더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아주 자신만만하게 진격한다. 그 해협은 폭이 매우 좁은 데다 해안선을 따라 방어용 포대가 길게 늘어져 있어 통과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지역이었다. 영국 육군도 그의 작전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처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군 단독으로 작전을 실행하고 만다. 그 때 터키는 자신들의 가장 오랜 적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결국 독일 측에 섰고 해협을 공격하러 오는 영국 연합군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전쟁 초반 터키는 열심히 해안 포를 이용해 영국 군함을 공격했다. 영국도 어마어마한 군함으로 열심히 터키의 진지를 향해 포를 날렸다. 하지만 터키의 군인들은 보통 농사짓다 온 사람들이라 훈련이 매우 부족했고 문맹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포 하나 제대로 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국군도 물살이 센 바다 위에서 포를 쏘려니 영 조준이 안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공격들은 서로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고 전쟁은 점점 흐지부지 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터키가 둔 신의 한 수로 상황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터키진지에서 내려다 본 갈리폴리 해안

깜깜한 새벽 제대로 된 군함 한 척 없었던 터키군은 자신들의 나무배를 타고 영국 군함이 매일 오가는 길목에 기뢰를 잔뜩 심는 작전을 수행한다. 자칫하면 기뢰에 본인들이 당할 수도 있고 영국군에 들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배치된 기뢰들은 프랑스 군함을 시작으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영국의 군함들까지 차례로 격침시키고 만다.

결국 처칠은 이를 계기로 해군성 장관직에서 사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연합군은 포기하지 않고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진행했고 여기에서부터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모를 잔혹한 역사가 시작되어버린 것이다.

잔혹한 전쟁의 무대가 된 갈리폴리
1915년 4월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한 달 만에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꾸려졌지만 당시 군사의 대부분은 파리 코 앞까지 치고 들어온 독일군에 대응하기 위해 보내져서 갈리폴리에는 영연방 국가의 일원이었던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군과 인도군이 보내지게 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렇다 할 상비군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징집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90%가 일병으로 채워진 군대가 파병되기에 이른다. 이들의 대부분은 이십 대 초반이었고 십 대도 굉장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급하게 보내진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철모 하나 지급되지 않았고 물과 식량에 대한 보급도 충분치 않았다.

이들은 어렵사리 명령 받은 지점에 도착했지만 조류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1km 떨어진 곳에 상륙을 해야 했다. 그곳은 상륙하기에 최악의 장소였다. 군인 수십 명이면 가득 찰 정도로 해변의 폭이 말도 안 되게 좁았던 것이다. 직접 가서 보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장소 선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거침 없이 타고 온 전함에서 내려 작은 보트에 올랐고 노를 저어 해변으로 향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탈수로 쓰러지거나 사망한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는 경사 70도의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도 대포를 지고 말이다.

이렇게 안작군이 죽을 힘을 다해 공격할 동안 터키군도 각종 고초를 겪고 있었다. 고지를 차지하고 있던 터키군은 대포와 포탄 및 각종 무기들을 진지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이동해야 했는데 사람과 나무 수레 등으로 옮기다 보니 보급이 느려지고 나중에는 총알이 없어 공격을 못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터키군은 결국 치열하게 절벽을 기어오른 안작군에게 고지를 빼앗기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터키 군인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때 케말파샤라는 젊은 장군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며 총알이 없으면 칼을 차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병사 하나하나가 온몸으로 서로를 막는 처절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결과는 터키가 승리했다.

갈리폴리 해변에 ‘ANZAC’ 공원 조성하고 추모 행사 가져
그날 제국들의 패권 다툼에 휘말린 수많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피비린내 나는 땅위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결국 누구의 승리도 중요하지 않은 날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연합군은 북쪽에 위치한 수블라 만을 통해 한 번 더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 다 엄청난 사상자만 낼 뿐 어떤 결론도 얻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영국군은 이 전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고 후퇴를 명령하며 역사상 최악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전쟁이 양측 50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

터키인들에게도 그날은 분명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테지만 그곳에서 사라진 호주, 뉴질랜드의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전투가 펼쳐지던 해변에 ‘ANZAC’이라는 공원을 조성하고, 상륙작전이 시행되었던 4월 25일을 안작 데이로 정해 매년 같은 날 희생된 젊은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뉴질랜드 묘역 중 일부

전쟁은 끝이 났지만 과거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며 머나먼 타국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젊은 영혼들을 생각해본다.
임영길 사관<구세군 오클랜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