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12월 23일 토요일 오전 11시 오클랜드 서쪽 콘윌리스 비치에서 최종원 학생의 침례식이 있었다. 종원의 침례식에는 어머니 이종남 집사와 최씨 집안에서는 아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식을 하려는 아들을 보려고 한국에서 온,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최윤석 아버지도 있었다.
“아들이 침례를 받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뭉클하면서 감동이 온다”고 아들의 침례식을 마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내 이종남 집사는“종원이가 최씨 집안에 믿음의 씨앗이 되어 가족과 친족이 모두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한다”고 하면서“남편도 아들이 침례 받은 이곳에서 침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남편도 마음이 열리고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종남 집사도 결혼 전에 오클랜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한마음한뜻교회(구, 오클랜드한인성결교회)에서 2000년 4월 23일 침례를 받았다. 결혼으로 한국에 가서 살다가 외아들을 낳고 10살이 된 종원을 데리고 다시 오클랜드로 와 아들이 2년 반 공부를 마쳤다.
이제 다시 한국으로 공부하러 가려고 했다. 종원이 오클랜드를 떠나기 하루 전에 침례를 받음으로써 어머니와 아들이 정확히 17년 8개월의 차이를 두고 침례를 받았다.
“와서 도우라’는 말씀과 비자 승인의 꿈이 현실이 돼
한마음한뜻교회는 1995년 9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선교사 대회에 참석한 뉴질랜드 디랙터 키쓰 리들 목사의 한국인 선교사의 요청으로 예수교대한성결교회총회 선교국의 추천으로 이승현과 장명애가 1996년 5월 26일- 6월 4일까지 오클랜드에 답사를 오게 됐다.
미국 파송 선교사 아플 게이트 선교사와의 인터뷰, 뉴질랜드 총회에서의 인터뷰 그리고 지역 교회의 담임목사와의 인터뷰와 장년과 청년의 만남은 모두가 평가의 절차였다. 설교와 모임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6년 5월 27일 아플 게이트 미국선교사와 인터뷰 마치고
사람의 눈으로 볼 때 1996년 당시 40여 한인교회가 있어 오클랜드에서의 교회개척은 정중히 사양을 했다. 5월 31일 금요일 저녁 키쓰 목사와 데니스 사모는 아내와 필자를 데리고 코르만델 파우아누이의 집으로 갔다.
함께 지내며 저녁에 손을 잡고 기도할 때 성령이 주시는 평안과 와서 도우라는 말씀을 동일하게 주셔 순종하기로 했다.
1996년은 한국의 뉴질랜드 영사관이 홍콩으로 이관하고, 한인의 뉴질랜드 이민의 문은 닫혀가고 있었다. 더욱이 종교비자를 신청하는데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종교비자는 생소하고 전혀 해 보지를 못해 못한다는 이민업체의 말을 듣고, 스스로 종교비자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2월 꿈에 뉴질랜드 비자가 여권에 찍히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아침에 가족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났을 때, 뉴질랜드 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면서 본인을 증명했다. 종교비자가 승인이 났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뉴질랜드 영사관에서 여권을 찾아 들고나서 모든 가구를 나누어주고 1997년 1월 4일 2살 아들과 1살 딸과 함께 필자부부는 인천을 떠나 필리핀과 홍콩에서 각각 2주씩 한국인 선교사의 현지인 사역을 답사하고 1월 31일에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비자 승인의 꿈대로 비자를 받고 1997년 1월 4일 김포떠나
주일학교 시작과 경건 훈련 그리고 예배 드려
1997년 2월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of New Zealand 교단 총회에서 한국인 선교사 부부로 공식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2월부터 4월까지 Frist Alliance Church에서 인턴십을 거쳤다.
4월부터 12월까지 1명의 유학생을 위해 West Harbour Alliance Church에서 협력사역을 하면서 4월 25일 프랭크 마샬 목사와 Holy Mission Cetre사역으로 유학생 영어성공모임을 시작했다.
또한, 오클랜드 이민자와 유학생의 생활과 종교성을 알아보니 장년보다 청년, 청년보다 청소년, 청소년보다 소년의 사역이 더 필요하다는 학부모의 요청으로 ‘날마다 가까이 예수님을 만나요(예영, 2000)’를 고학년과 저학년의 눈높이에 맞는 영어와 한국어 큐티 교재를 영국인 프랭크 마샬 목사와 함께 저술하여 1997년 12월 5일부터 15년 동안 라브리바이블스쿨을 운영했다.
일상생활에서의 말씀이 삶이 되도록 경건훈련을 하면서 아이들이 성장했다. 아이들이 자라 목회자, 선교사, 의사, 교사, 건축사, 간호사, 회계사, 변호사, 전문인과 직장인이 되고 결혼하여 여러 지역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부모들을 위해 라브리북카페를 열어 묵상훈련과 성경공부 그리고 핸더슨 지역에 건물을 얻어 여전도회에서 가라지 세일과 장터에 나가 물건을 팔아 모은 후원금으로 다양한 문화사역을 해나갔다.
같은 해 12월 25일 오전 11시 필자가정에서 유학생 2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누가복음 2장 8절-14절의 말씀으로‘그 어리신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1997년 12월 25일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난 뒤에 1814년 12월 25일 오전 뉴질랜드 북섬 오이히베이에서 사무엘 마스든 목사가 전한 본문과 날짜가 동일한 것을 알게 됐다.
도우시는 따스한 성령의 손길을 체험
1997년은 한국에서 언어연수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주로 대학과 학원에 온 언어연수생들을 만나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밥과 김치를 나눠 먹었다.
필자의 영국유학시절에 식당에서 일하면서도 유학생을 위해 집에서 밥을 해주던 문 사모의 영향으로 목회하면서 늘 밥과 김치를 준비해 두고 먹고 싶은 청년에게 밥을 해주었다. 오클랜드에서도 영어의 향상을 원하는 다민족 학생을 대상으로 프랭크 목사와 영어성경모임을 매주 가졌다.
아내는 언어연수생과 유학생이 많아지면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다치거나 아프거나 병들거나 어려운 청년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데려와 함께 지냈다.
아내는 결국 급성 폐결핵을 앓고 죽을뻔한 낯선 청년을 입원시키고 돕다가 탈진을 경험하고 결핵 검사도 받았다. 외국인과 결혼한 한인 여성이 어려움에 처해 보호할 때는 외국인으로부터 사람을 보내 죽이겠다는 협박도 받았다.
1997년 IMF를 맞아 필자가정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정말 아기들 기저귀와 우유 살 돈마저 떨어졌다. 이 시기에 유난히 많은 한국 청년들이 무작정 오클랜드로 왔다. 기초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조차 없어 도움을 주어야 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더불어 살았다.
어느 날은 청년들이 오는 날에 밥해줄 쌀만 남았다. 그런데, 3-4일 동안 먹을 것을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 같은 일들이 지속됐다. 주일날 교회에 갈 휘발유가 없어 5불이나 10불씩 넣어도 빨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청년들을 모두 데려다 주고 집에 와도 차가 멈추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설립 20주년 감사예배
십자가 지고 빈손으로 처음 사랑을 품으며 십자로에 서
방전된 밧데리로 차가 서버리면 그 때 아는 사람이거나 낯선 한인이 나타났다. 자동차가 펑크가 나서 겨우 서면, 자동차 타이어 집 옆이기도 했다.
이러한 처지에도 묵묵히 사역하는 것을 보고 초청한 교단에서 3년 동안 기본적인 생활비를 후원해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청년들은 목회자의 삶을 보고 예수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고 예배에서 공적 신앙고백과 성찬과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우며 믿음생활을 해나갔다. 청년들은 하나 둘 대학에 가거나 직장을 잡고 독립해 나갔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예수 영접, 침례, 공적 신앙고백보다 필요를 따라가
새천년이 되면서 장기사업비자를 가지고 오는 개인 사업자 가정이 늘어났다. 교회는 기존의 언어연수생과 유학생 그리고 새 이민자의 정착을 돕는 일에서 사업을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도움을 주어야 했다. 자녀의 신앙교육과 이민 첫 세대의 교회생활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시기였다.
정착과정에서 힘든 가정을 돕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더불어 마음을 나눌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개인과 가정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했다. 때로는 축귀도 있었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직장이 정착과 안정이 되면서 성장과 성숙함을 경험했다.
집, 자녀 학교, 병원, 가게가 기본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보다 더 나은 사업을 위해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여기는 교회로 이동했다. 여러 해 동안 한 가정의 정착과 가게 시작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다. 이웃 교회에서 데려가기도 했다.
가정과 직장이 안정되어 가면서 신앙생활은 정착되어갔다. 보다 더 나은 조건을 보고 호주 멜버른과 시드니 그리고 브리즈번으로 재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정이 떠났다.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일본과 다른 나라와 한국으로의 역이민으로 교회의 기둥이 빠져나갔다.
결혼주례를 마치고 장식한 꽃들이 아름다워 성도들과 함께
어린 유학생을 잘 돌보아 대학까지 가는 동안에 예수 믿고, 침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전도하여 예수 영접하고, 침례 받고 교회를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했다.
특별히, 아버지 전도를 위해 짧게는 5년, 10년 때로는 15년을 인내하며 전도를 하다가 때가 되어 아버지도 예수 믿고, 침례 받고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신앙 생활하다 보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동한다. 이러할 때마다 울었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를 실천해
이천 년 중반에 들면서 경제 침체와 환율의 상승 그리고 유학 붐의 저조 등으로 뉴질랜드로의 유학이 현격히 줄어 들었다. 상대적으로 언어연수생도 줄었다. 취업 비자나 유학 후 취업도 저조하다. 이민은 영어점수와 조건 강화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로서 뉴질랜드에 오는 한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분명 3명 중 2명의 한인은 전도대상이지만 전도 대상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불특정 다수의 한인에게 전도하기란 이민환경에서 어렵다. 물어보면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전도의 기회를 차단한다. 전도의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어렵고 힘들게 전도해서는 타 교회로 가버리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결단으로 교회 설립 20주년인 지난 해에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1년간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남은 교인에게 각자 가고 싶은 교회에 가라고 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갔다.
유학생 3가정은 남은 1년 동안 함께 한다고 해서 영어예배에 같이 예배자로 살았다. 그래도 유학생 가정의 돌봄은 계속 됐다. 11월에 2가정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자녀들이 침례를 받고 떠났다.
그리고 남은 한 가정에서도 종원이가 침례를 받고 24일 한밤중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교회 설립 20주년이 되는 12월 25일 오전 11시 오직 필자 가족만이 남아 교회 설립 20주년 감사예배를 드렸다. 오직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살아온 이민목회 20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한걸음씩 걸어왔다.
목(木)사(死)는 나무에 달려 죽을 자로 알고 다시 시작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속히 오라고 하면서 모두가 떠나고 누가만 남아 있다고 했다.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서 유두고를 살리고 덮어주었던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디모데는 그해 겨울을 지나 봄에 로마에 왔을 때 바울은 이미 순교한 뒤였다.
죽을 때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바울을 묵상해 본다.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20년 동안의 목회를 통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바울 곁에 남은 누가처럼 필자에게도 아내와 두 자녀가 곁에 있다. 다시 한번 목사는 누구인가를 묵상해본다. 목(木)사(死)는 나무에 달려 죽을 자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내 십자가를 지고 빈손으로 처음사랑을 가슴에 품고 십자로에 선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동역자를 만나기를 기도하면서.
지난 20년을 되돌아 보니
바누아투 산토와 펜타코스트에서 온 릭과 사무엘 목사와 함께
한 지역에서 20년간 사역
라브리바이블스쿨 15년 사역
‘날마다 가까이 예수님을 만나요’ 프랭크, 장명애, 이승현 공저(예영, 2000, 기독출판상)
라브리문화센터
라브리북카페(경건운동-큐티)
다양한 성경공부방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문학과 영화 모임 운영
뉴질랜드 및 오클랜드 영적 회복 위한 기도모임
외국인과 결혼한 가정 돌봄
한국 입양아 가정 돌봄
뉴질랜드 교단에서 다민족 연합
바누아투 및 태국 선교
단체 차량 및 봉사
목회상담 및 돌봄
유학생 및 워킹 호올러 돌봄
크리스천라이프 13년 섬김
‘은밀히 거래된 나의 인생, 그 길을 가다’ 장명애(예영, 2017)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