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꿈꾸는 꿈으로 인해 가벼움에 뛸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에 떨 것인가? 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라.
좋은 꿈을 꾸면 선몽이라고 하고, 나쁜 꿈을 꾸면 악몽이라고 하지만, 선악의 꿈은 하나의 꿈일 뿐이다. 세월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삶의 끝에 서고 나면, 지나온 삶은 마음의 감정에 따라 선몽이기도 하고 악몽이기도 하다.
이생과 저생의 경계에는 오직 살아온 날의 기억이 꿈으로만 남는다. 평생을 더불어 지내온 배우자에게 조차 전할 말 한마디 못하는 순간이 온다. 선몽이면 희미한 웃음의 입 꼬리로, 악몽이면 세미한 얼굴의 경직으로 드러난다. 산 자의 마지막 가는 순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한숨뿐이다.
이처럼 인간(人間)은 생명에 기뻐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열린 창으로 달을 보는 존재이고, 사람은 살아가면서 알아가는 존재이다. 인간과 사람은 결국, 타고난 죽음으로 가는 결핍의 존재이다. 사람은 날마다 아주 조금씩 꾸준히 죽음의 결핍을 채워가며 산다.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외면하고, 살아있는 한 못된 욕망으로 무엇이든 거저 가지려고 한다. 쉽고 편한 것만 추구한다. 땀 흘리지 않고도 이익은 얻으려고만 한다. 손해 안보고 이익을 챙기려고, 따지고 캐묻고 눈총을 주고 누르고 빼앗으려는 욕심이 가득하다. 서로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이로서, 아픈 기억의 ‘한’은 풀어야 하고, 기쁜 상상의 ‘복’은 나누어야 온다. 또렷한 생각보다 희미한 땀내가 낫다. 언제 어디서나 무한히 안겨줄 수 있는 마음의 꽃다발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다. 선한 꿈을 가진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이웃을 대한다.
무엇이든 하려면 그만 생각하고, 가슴이 뛸 때 하라, 다리를 떨 때는 늦다. 살아있는 한은 선몽이든 악몽이든 꿈 같은 성긴 꿈을 꿀 수 있다. 꿈은 생생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다만 놓치고 싶지 않은 꿈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꿈은 어둠 속에서 광명으로 이끄는 신비한 힘과 능력이 있다.
선한 꿈은 믿음으로 행할 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음 속의 깊은 소망은 선한 꿈에서 발견하게 된다. 반대로 마음 속의 깊은 상실은 악한 꿈으로 인해 방황한다. 지금 꿈이 있는가, 자라고 있는가, 만족하는가 보라. 지금 가장 좋은 것은, 나에게 주어진 생명이고 건강이며 꿈이 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성공의 꿈보다 성취의 꿈이 낫다. 그러나 성취의 꿈보다 성자의 꿈을 이뤄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이 곧 온다. 그날에 이생에서의 생은 선한 꿈이었다고 고백하던지, 악한 꿈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세상에서의 삶은 성긴 꿈 속에서의 나날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날까지 정말 선한 꿈을 안고 잘 살아야 한다.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