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지를 찾아서

종교개혁, 그 현장에서 진실과 교회의 길을 묻다

0
237

존 낙스의 생가에서 그가 화형 당할 때 타다 남은 나무 앞에 선 임영길 사관

기독교 세계로 가는 새로운 문을 열다
카톨릭의 탄압으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개혁가들은 개혁의 길에서 숱한 위기에 처했으며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암울했던 그 시대에 그들은 당대 교회와 성직자가 누리던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 세계로 가는 새로운 문을 열었는데 그것이 16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그 운동은 기본적으로 신앙 개혁 운동이었지만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에서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치는 전선(戰線)이 되었다.

사람들의 삶이 교회와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에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집약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극단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돌며 흘린 땀방울들이 앞으로 소개하게 될 많은 지역들을 통해서 독자들의 신앙과 삶에 풍성한 은혜가 넘치길 기도한다.

터가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신학’을 비판하며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95개조 논제를 걸었던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그 100년 전에는 체코에 얀후스가 있었고 또 그 100년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가 있었다.


얀 후스


존 위클리프

그들도 루터 못지않게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부패한 로마가톨릭 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었지만 위클리프는 부관참시 당했고 얀 후스는 화형 당해서 죽었다.

그리고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들이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에 나와있는데,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였다면, 얀 후스는 실천적 개혁가였고 그 영향력을 받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완성을 이루었다.


루터

그래서 그 후에 프랑스의 장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영국의 존 웨슬리 윌리엄부스 등으로 이어지는 부흥의 세대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장 칼뱅


존 낙스

부패와 세속화에 빠져 있던 중세교회에 말씀 선포로 도전한 위클리프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약1320-1384)는 1320년경 영국의 요크셔 (Yorkshire)에서 태어나서 옥스퍼드 발리올(Balliol)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심령에 큰 변화를 받은 위클리프는 1338년 19세에 회심하게 되었고, 회심 후 그는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바치기로 헌신한다.

위클리프가 헌신하던 14세기 영국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던 때이며 영국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고통을 받던 시기였다.

교황은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이다.”라고 말하였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가 교회에 뿌리 잡고 있었다. 또한 거짓 교리와 부패와 면죄부 판매같은 관행들이 날로 증가하였으며, 성직자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공표한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교황청은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권력까지도 장악하여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교황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권이 복음을 찬탈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영국의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교회의 수입은 당시 나라의 수입보다 약 2~3배가 많았다.

교회에 부가 많은 이유는 돈 많은 귀족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줄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해서까지 미사를 드려준 데 대한 대가와 연옥에 대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부를 교회에 헌납했기 때문이다.

그 때 존 위클리프는 부패와 세속화에 빠져 있던 교회에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교리와 실천을 거부하면서 잘못된 신앙과 가톨릭 교회 교리의 해악을 세상에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에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확신하며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쥐여 주기 위해 당시 라틴어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는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성경 번역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번역자들을 처벌해 왔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하는 일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었다.

드디어 1382년 위클리프와 제자들은 최초로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 전권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위클리프 성경(The Wycliffe Bible)이다.

성경 전체가 영어로 번역된 것은 1,000년 만에 처음 있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최초로 영국 백성에게 영어로 번역한 성경을 건네준 사람이었다. 위클리프 영어 성경은 영국의 종교개혁과 부흥에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1384년 12월 31일 위클리프는 마지막 목회지 루터워스(Lutterworth) 목사관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루터워스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교황은 콘스탄츠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하고 그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당국은 위클리프의 유해를 무덤에서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뼈를 태운 후 그 재를 스위프트(Swift) 강에 뿌렸다.

하지만 위클리프의 재는 개혁과 부흥을 위한 불씨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 및 열매는 결코 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유럽
유럽은 종교개혁은 물론이고 경건주의와 대각성운동, 현대신학연구의 발원지였다. 특히 윌리엄 캐리 이후 현대 선교 운동의 모체가 되어 다른 대륙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전진 기지의 역할을 수행해 온 대륙이다.

그러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말한대로 기독교는 지금 서구 세계에서 더 이상 아무런 매력을 주지 못하는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오랫동안 세속화되어 온 유럽에서 교회는 생존을 염려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몰락할 것이라고도 한다.

유럽 교회가 거의 2천년 동안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만큼 이러한 추세는 세계 교회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는 참다운 복음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 복음의 회복을 위해서 복음의 서진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전 기사314호 크리스천
다음 기사315호 라이프
임영길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오클랜드한인교회 담임사관.루터의 독일, 장 칼뱅, 츠빙글리의 프랑스와 스위스, 얀후스의 체코, 네덜란드와 벨기에, 존 낙스의 스코틀랜드, 감리교와 구세군의 부흥지 영국, 종교개혁이 넘지 못했던 스페인, 무슬림의 땅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답사하여 그들의 사역을 전하고자 한다.